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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Feb 17. 2021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실패 속에 자라나는 오기

  이 글의 제목은 버트런드 러셀의 책과 같다.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내용은 사실 러셀의 글과 별로 상관은 없다는 걸 먼저 밝힌다.


  나는 모태신앙인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부터 찬송가를 들었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신과 부모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어릴 때부터 방황을 많이 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그냥 모든 게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방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 일찍 애어른이 되었다. 애어른이란 말은 별 뜻 없다. 그냥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다. 아직도 남의 눈치를 잘 보는 것은 모두 이때 기른 능력이었다. 애어른의 특징 중 하나는 속마음이 깊다는 것이다. 이건 이해심이 깊다는 것과 다르다. 또 속셈이 많다는 것도 아니다. 속마음이 깊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걸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우물을 파면 어느새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렇게 어른의 눈치를 잘 보는 아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런 아이는 교회에서도 잘 적응한다. 언제 방황했냐는 듯 성실함을 잘 갖추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사춘기 예방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중학생 때는 완벽한 애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 나의 진정한 신앙생활도 시작됐다.


  정말 진심으로 신을 믿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실 어릴 때라 성경의 내용은 잘 모르겠고, 그저 아름다운 찬송가와 신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감정이 좋았다. 특히나 누군가 나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내게 진심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예수의 삶을 뒤쫓는 게 참된 어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그물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고. 베드로는 지체 없이 예수를 따랐다. 베드로가 보여준 믿음의 자세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후에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걸 세 번 부인하고 회개한다. 이런 인간적인 모습마저 믿음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도 어렸기에 신앙생활에서 많은 실패를 겪었고, 이 또한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거라 믿었다.


  그렇게 나의 10대는 신앙생활로 충만해졌다. 내 삶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나의 정신을 매일 가다듬었다. 매일 밤 기도하며 회개했고 매일 아침 CCM 음악으로 잠을 깼다. 때로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꾸짖기도 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일을 ‘정죄한다’고 표현하는데 좋지 못한 일이라 또다시 회개하곤 했다.


  위에서 말했듯 눈치 빠른 아이들이 끝내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고 했던가. 나는 내 상황이 어떻게 되든 믿음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는 세속적인 성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세속적인 성공으로 믿음의 크기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는 신학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삶에서 실패를 겪고 믿음을 잃었다. 믿음의 대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지만 잇따른 개인사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했다. 후에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제는 머리로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감정적인 이유로 신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때 알았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런 수많은 신앙인들도 이런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신앙이 없지만, 다른 의미의 신앙은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모든 가치 중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나오는 말처럼,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종교의 많은 교리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의심으로부터 믿음이 나오도록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부터 믿음이 나오도록 만든다. 일찍이 파스칼이 깨달았듯이 믿음이 사람을 기도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기도가 사람을 믿게 만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나 자신을 깊이 있게 다시 볼 수 있었다. 신이 없어진 자리에서 헐벗은 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제 나가 내 자신을 속일 때마다 그 거짓말이 티가 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자신을 속인다. 하지만 전처럼 신을 믿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죄를 고백할 사람이 없다. 나 자신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정말 죄가 되는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이 질문에 답을 한다면, 우리는 홀로 서있을 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높이 자라는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가장 높은 산은 가장 깊은 골짜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나무와 산이 더 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고 속여서는 안 된다. 이게 나의 답이다.


  요즘 나는 예술을 하며 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제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로 인해 또 자신을 열심히 속이려는 중이다. 서있기 위해 버티지만 조금씩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다. 요즘 부쩍 비겁하고 옹졸해진다. 그러나 나를 속이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한테 만큼은 솔직하고 싶은 요즘이다.


그림자가 두려운 사람은 사실 빛이 두려운 것이다.


  이장욱 시인의 <표백>의 일부분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거울은 아니지만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골목이 아니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러
한꺼번에 거대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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