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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힐러스bookhealers Jul 03. 2024

나는 중국에서 결혼하고 중국에서 이혼했다. 01

#01 중국 법원에서의 2차 소송

  그녀는 이전보다 더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잠시 응시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했다. 중국 법원의 소송자와 피소송자의 거리는 약 2미터 남짓. 하지만 난 그 거리도 부담스러웠다. 가운데 벽을 가로막든가 아니면 10미터 정도로 거리를 벌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변호사를 선두로 팀을 짠 구단주 같았다. 그녀와 변호사, 그리고 두 친구들이 뭔가 작전을 짜는 듯 보였다. 그에 비해서 한국인인 나는 달랑 혼자 우두커니 법원의 차디찬 타일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엄격한 복장을 한 판사와 기록 담당관이 들어왔다. 5명 모두 마치 한 마음이라도 된 양 모두 동시에 일어서서 예의를 차렸다. 


  판사의 엄중한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소송자 장**과 피소송자 **의 2차 이혼 소송을 진행하겠습니다. '땅땅땅'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1차 이혼소송에 패소하고 정확히 10개월이 흘렀다. 1차 소송에 패소한 후 6개월만 지나면 2차 소송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혼 소송을 시작한 지는 어언 2년이 흘렀다. 정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긴 터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연애부터 16년이란 긴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대학을 다니면서 운영했던 선술집에서였다. 유학생 신분으로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난 대학 졸업장이 절박했고 홀어머니는 본과 4년을 지원해 줄 수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한국의 **은행애서 1천만 원을 대출받아 주셨고 난 작게 선술집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손님은 넘쳐났고 몸은 고됬지만 본과 4년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4학년 크리스마스이브날 그녀가 가게에 왔었다. 평소 단골이던 중국 손님이 데리고 왔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이쁘지 않았다. 얼굴에는 여드름이 한가득이었고 몸은 해골처럼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마음이 훅 갔던 이유는 처절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중국 연변대학에서 만나서 4년을 사귀었던 오드리햇번을 닮았던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내 상실의 아픔은 생각보다 컸다. 놀이공원을 하시던 아버지, 여호와 증인에 목을 매신 어머니 때문에 강압적으로 헤어진 것이기에 아픔은 더 컸다. 아버지는 홀어머니에 가난한 집 장남이란 이유로 반대했고 어머니는 여호와 증인으로 개종하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어머니에게 협박 전화가 오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포기했다. 


  그때부터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한국 여자는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집안, 경제력, 학벌, 부모님의 사회적 위치를 따지는데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별은 외로움과 고독으로 내게 몰려왔고 난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그렇게 싫어하던 룸살롱도 다니기 시작했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내 이성과 마음은 이미 분리된 지 오래였다. 아침이 되면 후회하고 저녁이 되면 난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만큼 매출로 이어지니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며 당당하게 매일 술에 취했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 나타난 사람이 그녀였다. 난 허전한 마음을 그녀에게 기대고 싶었다. 내 타입도 아니었고 성격도 매몰차고 냉정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를 가게에 데려온 이모와 이모부도 우리를 맺어 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밥을 사주고 가게에 데리고 오고 함께 노래방도 가주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고 돈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깨워 주었다. 


  "소송자 장**씨는 혼자 오셨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겁니까?" 


  판사의 한 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네,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중국어로 대답했다.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 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실 나눌 재산도 없고 있다고 해도 다 포기합니다. 양육권도 아내에게 모든 결정권을 주겠습니다. 전 이혼만 하고 싶습니다."


  "그럼 피소송자 측 변호인 할 말 있으면 해 보세요."


  "네, 매달 한 아이당 80만 원의 양육비와 위로금 3천만 원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큰 아들이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학비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장**씨 생각은 어떤가요?"


  "양육비는 가능하지만 위로금과 유학비는 당장 불가합니다. 아들 유학에 관해서 저와 전혀 상의한 적이 없고 저는 유학 자체를 반대합니다."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일단 저지르고 뒤처리는 내가 함께 짊어 져야 했다. 갑자기 옷가게를 하겠다며 나도 모르게 덜컥 상가 분양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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