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다니는 자가용 의자 차의 차주인 할머니를 산책로에서 오늘 아침에도 뵈었다.
자가용 의자 차라는 것은 유모차에서 아이를 눕히는 곳을 들어내고 거기에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설치한 것이다. 뒤에서 밀고 다니다 필요한 곳에 차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다음 앞으로 와 그 자가용에 앉아서 쉬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용도로 사용하는 차를 말한다. 모양이 유모차처럼 생겼지만, 아예 처음부터 노인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건, 그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할아버지는 뵌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여성 전용차를 할머니 두세 분이 마주 보게 차를 주차하고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은 정말 정겨운 풍경이다.
일찍 나오셨다고 인사했더니, 맨날 이 시간에 나오신단다. 맨날 같은 시간이라면 나도 맨날 같은 시간에 나오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못 뵈었다.
우리말은 그 범위가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가다가 길을 물으면 맨날 바로 요 앞이란다. 바로 요 앞을 차로 이삼십 분 정도를 가게 되는 것도 우리말의 현실이다. 마음이 넓어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사회가 조용할 것이다.
“이거 한 번 먹어 봐.” 하셔서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더니 라면과자를 손에 부어주신다. 얼른 한 손을 마저 붙였다. 너무 많은 양을 쏟아부으셨기 때문이다. “조금 더 줄까? 한 번 주면 정이 없다는데.” 하신다.
돌아가신 내 할머니를 생각하게 한다.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를 여쭤본 적은 없다. 나를 어린 손자처럼 대하셔서 나도 그냥 내 할머니같이 공손하게 대할 뿐이다. 내 하얀 백발에 비하면 할머니의 머리는 이팔청춘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논리 전에 정(情)을 앞세울 때의 이야기다.
2024. 0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