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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Jul 28. 2021

너에게 스며들다

피카소

피카소 전시회에 갔다. 피카소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이 화가와는 인연이 깊다. 


피카소라는 화가가 내 머릿속에 각인된 건, 한 편의 미드 때문이다. 물론 미술 시간에 예쁘지도 않은 독특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우긴 했지만(‘입체파’라는 말도 함께 외웠던 기억이 있다), 다른 화가들처럼 그냥 시험에 나오니까 외워야 되는 화가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 내가 좋아했던 미드 중에 ‘영 인디아나 존스’라는 드라마가 있다. 그 유명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그린 드라마였는데, 일종의 프리퀄 시리즈였다. 어렸을 때부터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인디가 나온다.


인상적이었던 건, 인디가 세상의 유명한 위인들을 다 만나고 다닌다는 거였다. 에디슨, 포드(미국 자동차 왕), 심지어 레닌도 만난다. 그들의 발명의 순간이나 혁명의 순간,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인디가 함께 했다.

그런 설정이 너무 흥미로워 시간이 꽤 지난 후에도 몇몇 장면은 또렷이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도 ‘이 드라마 참 잘 만들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 한 줄로 언급됐던 역사적 사건들의 전후 스토리를 알게 되니 ‘그 사건이 이래서 이렇게 됐구나’가 깨달아졌다(그러고 보면 아이들 교육용으로도 꽤 유용한 드라마였다. 비록 픽션이 첨가되긴 했지만).


인디가 만나는 위인 중에 피카소도 있었다. 젊은 시절, 명성을 얻기 전 피카소가 나오는데,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막 창조한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게 무슨 장난이냐”며 비난을 퍼부었고, 피카소는 졸지에 그림을 아주 못 그리는 화가 취급을 받는다(하긴 지금의 우리들이 봐도 난해하긴 마찬가지니, 그땐 더 했겠지).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 당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모네나 마네처럼 그리지 못해서 이렇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네와 똑같은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카페(그 당시 모든 사건의 발생지는 카페였다)에 있던 사람들은 피카소가 자신이 그렸다는 말을 하지 않자, 당연히 모네 그림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피카소는 그 그림에 모네와 똑같은 서명을 해 사람들을 속였다!

그 사건이 실제 사건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그 드라마를 보며 피카소라는 화가가 내 머리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교과서에서만 봤던, 그의 그림을 실제로 영접하는 날이 왔다!

대학교 1학년 때, 생애 처음으로 갔던 전시회가 피카소 전시회였던 거다. 그 해가 무슨 피카소와 관련된 기념할 만한 해였던 것 같은데, 꽤 많은 양의 작품이 한국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그의 그림이 너무 좋고, 어떤 울림이 왔다기보다 내 인생 처음으로 전시회라는 곳에 왔다는 감격이 더 컸던 시간이었다. 그냥 다 신기했고, 그때 막 그림이라는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던 때라 어떤 화가라도 좋았을 시간이었다. 기억에 남았던 건 말년에 그가 창작한 그림과 조형물들이었다.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낙서와 장난 같았던(접시에 댤걀 프라이가 담긴 작품도 있었다) 작품들이 미소를 불렀다.


그렇게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을 남겼던’ 피카소를 다시 파리에서 재회하게 된다. 무려 피카소 미술관에 간 거다. 유학 중에 그 많은 파리 미술관 중 왜 굳이 거기를 갔는지 생각은 안 난다.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로댕 등 웬만한 미술관은 다 가 본 뒤라 이젠 피카소 미술관도 가 볼까, 했던 걸까. 아무튼 혼자서 마레 지구에 있는 그 미술관을 찾아갔다. 피카소는 스페인 태생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기간이 더 길어, 파리에 있는 미술관이 가장 많은 피카소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5년 만에 재회한 그는 달라 보였다. 그동안 내가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었던 탓일까(이국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날들이었다). 어떤 그림은 한참 동안 나의 발길을 묶어두었다. 곡선보다 직선이 더 많은 인물들 사이로 삶의 고단함이 보였고, 두려움이 느껴졌으며, 슬픔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방문이 더 인상에 남았던 건 그 동네 때문이었다. 마레 지구를 처음 가 본 날이었다. 합한 카페와 가게가 많은 동네로, 멋 좀 안다는 ‘힙스터’들이 다 모인 동네였다. 피카소 미술관을 나온 뒤 동네를 산책했는데,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골목에 들어섰다. 가게들은 사라지고, 주택들만 들어선 곳이었는데 방금 내가 정신 팔려 돌아다녔던 곳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었고, 띄엄띄엄 있는 문들은 굳게 닫혀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 세상과는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은 곳이었다. 진공상태 같았던 그 정적까지. 신비하면서도 약간은 두려운.

쫄보였던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큰길로 나갔다. 하지만 그 골목에 대한 인상이 너무 깊어 난 나의 첫 소설에도 그 골목에 대한 인상을 언급했다.      


피카소와의 세 번째 만남은 의외의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풍처럼 다가왔다.

미국 LA를 장기 여행하던 중이었다. 여행에서 미술관 방문을 우선순위에 두는 나답게 LA에서 가장 유명한 LACMA(LA카운티 미술관)를 찾았다.


여러 시대, 다양한 국적의 화가들의 작품이 모인 곳이라 당연히 피카소 작품도 있었는데, 사실 미술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 갔던 터라 어떤 방에서 그를 마주쳤을 땐 너무 반가웠다. 흡사 삼촌을 만난 기분이었다.

“삼촌!”하고 뛰어갔는데, 갔는데, 그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이 갑자기 폭풍 같은 눈물이 흘렀다. 작품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피카소의 연인 중 한 명을 그린 그림이었다. 


몇 년간의 직장 생활에 지치고 지쳐서, 직장에 사표를 낸 참이었다. 인간관계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내 정신과 마음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난 사람들이 볼 새라 황급히 정원 쪽으로 나 있는 통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 감정이 차분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미술관을 들어설 때보다는 분명히 밝은 표정으로 미술관을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또 내 정신이 고갈됐다고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의 창고가 텅텅 비어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구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미술관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피카소와의 세 번째 만남 이후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건데, 피카소와 만날 때마다 난 인생의 변곡점에 서 있었다. 막 성인인 된 20살에 피카소와 처음 만났고, 두 번째 그를 만났을 땐 난 내 인생이 터닝포인트가 된 유학 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이후 또다시 내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의 그림은 익살스러운 어떤 아저씨의 낙서에서 삶이 보이는 그림으로, 또 나의 눈물을 부르는 그림으로 달라져 있었다.     


난 2021년 서울에서 피카소를 다시 만났다. 파리 유학 시절의 추억이 생각나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는데, 전시실을 도는 내내 나는 그 시절로 타입 슬립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림을 보면서 우아했던 프랑스인 집주인 아주머니도 생각났고, 불어 못 한다고 멸시를 받던 억울하고 힘들었던 순간도 생각났고, 또 내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준 천사들도 스쳐 지나갔다. 피카소 그림을 보고 있었지만, 그 프레임 속에는 그 시절 풍경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피카소는 말년에 분명 유머 가득한 괴짜 할아버지였을 것 같다. 언젠가 피카소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엽서를 구매했다.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유명한 사진이다. 식탁 위에는 손가락 모양으로 만든 빵이 놓여 있고, 그는 그게 자신의 손인양 팔을 식탁 밑으로 내리고 연기를 하고 있다. 뚱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시치미를 떼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분명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아닌데, 아니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 화가인데, 이렇게 그와의 인연을 되짚다 보니, 그에 대한 새로운 애정들이 샘솟는다. 이제 나는 그의 팬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다시 내 인생의 변곡점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그리고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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