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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Feb 15. 2023

예천(醴泉) 이야기

막내 동서가 올초 새로 발령(發令) 받은 곳에서 처형의 예순 한 번째 생일인 환갑 축하해 주기로 지난 설날 갑자기 약속이 되어, 이번 주말을 이용해서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예천을 다녀왔다. 예천은 공군 제16 전투비행단이 상주(常住)하고 있는 곳으로, 얼마 전 동서가 이곳으로 부임(赴任)을 했다.


토요일,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곳은 예천 용궁 시장 안 '단골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전통 막창순대, 오징어와 돼지 석쇠 불고기 등이 주 메뉴인데, 전국적으로 름난 맛집 가운데 한 곳이다. 작년 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한번 다녀가서인지 거의 1년 만의 발걸음이 그다지 낯설지가 않았다. 막창순대 하나에다 오징어와 돼지 석쇠 불고기 둘, 닭발구이 하나까지 메뉴별로 주문을 넣고 나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상차림이 푸짐하게 올라왔다. 경상북도 북부지역 고유의 찰진 고추장에다 다진 마늘을 간장과 참기름으로 버무려 석쇠로 구워낸 불고기는 사람들의 기호(嗜好)에 따라 다를 순 있겠지만 첫맛이 무척 강렬했다. 하지만 무엇을 주문해서 먹든, 식재료 고유의 식감(食感)과 조리를 통해 전달되는 음식의 풍미(風味)이를 상쇄(相殺)하고도 남을 만큼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바로 이어서 나온 국밥 역시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가 전혀 나지 않는 담백한 국물맛이 일품이었다.


아직은 날이 덜 풀려서인지, 식당은 웨이팅을 해야 할 만큼 붐볐지만 시장 안 거리는 대체로 한산한 편이었다. 이제 막 열두 시를 넘어선 시간은, 예천을 찾은 관광객들이 아직은 관광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거나 어느 한 곳에 머물고 있을 시점임이 분명해 보였다. 식당 주인의 말을 빌자면, 두세 시가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물밀 듯 몰려들기 시작해서 저녁시간까지 잠시도 숨 돌릴 틈이 없다고 했다. 식당을 살짝 벗어나 골목길을 돌아나가면 마주 보이는 용궁 전통시장 이벤트 존의 용머리 조형물은, 입을 벌린 머리 쪽이 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그  뒤로 길게 늘어선 비닐하우스가 날짜에 따라 장마당이 서는 재래시장인 것 같았다. '단골식당'용궁시장을 먹여 살린다더니, 시장 안 본관과 함께 주차장이 넓은 별관에다 봄이면 곧 문을 열게 될 신축 중인 신관까지 더해지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용궁시장이야 말로 '단골식당'으로 대표되는 가히 순대 국밥의 전국적인 명소로 우뚝 설 게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용궁시장찾아오는 사람들이 재래시장까지 두루 둘러보면서 이곳의 먹거리와 볼거리에 더해 시골장의 감성(感性)에도 흠뻑 젖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슬쩍 들기도 했다.


막내 동서는 부대 안 독신자 숙소에서 홀로 지내면서, 부임지(赴任地) 달리 발령 날 때까지는 일 년 가까이 가족이 있는 서울로 휴가시에만 부득이 다녀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직장과 학교를 다녀야 하기에 주말을 이용해 예천을 오가야 하는 은 오롯이 처제 몫이 되고 말았다. 동서가 예천 한 곳 하더라도 세 번째 근무를 하게 되었기에, 이전에도 이곳을 다녀  적이 있었고 력단련장에서 동서들끼리 어울려 함께 골프를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계급이나 직급이 높아질수록 본인은 물론이고 친인척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처신을 바르게 하고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으므로, 이번 모임은 오로지 처형의 환갑을 축하하는 자리를 겸해 오랜만에 부대를 방문하는 행사로 국한(局限) 하였다. 코로나 이후로는 이런 모임이 거의 처음인지라,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는 먼저 근처의 온천부터 들리기로 했다. 오후엔 서로 약속된 일정이 있어서 점심을 먹고는 각자 집으로 바로 출발해야 했으므로, 예천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예천온천'에 들러서 우선 목욕부터 하기로 뜻을 모았다. 부대 숙소 앞에 있는 정원수(庭園樹)는 가지마다 지난밤 사이 꽃을 피운 상고대로 보는 눈을 즐겁게 했다. 결빙(結氷)이 되는 날이 좀처럼 드문 포항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30 여분을 달려 도착한 '예천온천'알칼리성의 온천수(溫泉水) 좋다고 인근에 소문서인지는 몰라도 열 시쯤인데도 욕탕 안이 온천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처음 예천으로 올 때는 인근의 회룡포(回龍浦)나 삼강주막까지 둘러보려고 했으나, 어제 용궁 '단골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곧장 부대 숙소로 곧장 직행했었기에 사실 일말의 아쉬움이 없진 않았었다. 예천이 내륙에 자리 잡고 있긴 해도, 한자 이름이  단술 예(醴)와 샘 천(泉) 조합(調合)되어 있는 것에서도 보듯이 예로부터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금천과 내성천, 낙동강의 삼강이 합류하는 삼강마을 주막은 인근의 삼강나루에 실재(實在)했던 주막이었으며,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이기도 한 내성천이 태극 문양으로 휘감아 돌아 나오며 생겨난 모래사장 위에 들어선 포구(浦口)를 말한다. 따지고 보자면, 용궁(龍宮) 역시 용이 살던 곳, Dragon Palace를 일컬음이니, 회룡포란 지명 속의 용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마침, '예천온천'으로 들어서는 길목 이정표(里程標)에서 보았던 천연기념물 294호 석송령(石松靈)이 생각나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그곳은 꼭 둘러보기로 했다. 석송령은 석평마을에 있는 반송(盤松)으로 수령(樹齡)이 칠백 년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11미터, 줄기 둘레가 4.2미터에 이르고, 흔히 부자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수목(樹木) 자체가 1,200평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세금까지 내고 있는데, 토지 임대료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하니 과연 석평마을의 영험 있는 소나무, 다시 말해 석송령이라 불러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석송령을 낙뢰(落雷)로부터 보호하고자 피뢰침을 설치해 두고, 번식과 혈통 보존을 위해 우량(優良) 유전자를 추출하여 싹을 틔운 석송령 2세 두 그루도 곁에 함께 심어서 이를 관리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석송령을 보고 돌아 나오는데 전통 수제 찹쌀떡 가게인 '석송령 만수당'이 눈에 들어왔다. 호감형의 젊은 사장의 성씨가 공교롭게도 석(石) 가인 데다 본인의 이름 '만수'를 따서 나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이어 붙인 가게 이름이 '석송령 만수당'인 것이다. 자리를 옮기자마자 바로 점심을 먹어야 했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도 있듯이 그저 한 번  찹쌀떡이 예사로 넘길 맛이 아니었다. 방금 받은 주문의 포장을 마치자마자 다시 세 박스 주문을 넣었는데도 이를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루를 넘길 수밖에 없는 원거리 택배를 마다하는 이유가, 방부제나 유화제를 쓰지 않는 전통 수제 찹쌀떡 재료인 앙금과 찹쌀가루가 하루가 넘어서기 무섭게 쉬어버리기 때문이라니, 이만하면 젊은 주인의 소탈한 양심이 달착지근한 찹쌀떡 맛에 못지않아 보였다.


점심은 예천 읍내의  다른 맛집인 '제주복집'에서 복지리와 복껍질 무침, 복튀김으로 이루어진 스페셜 세트를 먹었는데 맛이나 양에 비해 가격은 상당히 저렴한 편으로, 대도시의 복어탕 한 그릇 값에 지나지 않는 만 오천 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천은 예로부터 질 좋은 소고기로도 이름 높지만, 내륙인데도 복어식당이 늘 문정성시(門前成市)를 이루는 희한한 곳이다. 종종 예천을 들릴 일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한 번쯤 들리는 곳이 복집인데, 특히 복샤브와 유사하게 조리해서 먹는 야채 복불고기는 맛이 복샤브와 유사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있어 흔히 먹을 수 있는 복요리를 젖혀두고 늘 우선해서 먹곤 했다. 특히, 식사 후 디저트로 나오는 호박 식혜는 한 번만 먹고 지나치기 아쉬울 만큼 뒤끝이 남는 감칠맛이 특별났다.


예천의 커피 명소인 '봉덕창고'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고 난 후 포항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후 세시를 막 넘어서였다. 서안동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동안동을 거쳐 영덕으로 빠지는 길을 택했는데, 지난밤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워서였는지 몰라도 운전 중에 느닷없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장실에도 들를 겸 주왕산 가까운 청송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어제 점심부터 과식을 한 탓인지 속이 더부룩해서 꽤 오랫동안 화장실에 머물며,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졸음을 물리치려고 애를 썼다. 차 안의 쓰레기를 마저 버리고 나서 차를 몰고 휴게소를 빠져나가는데 뭔가 허전했다. 급히 이쪽저쪽 주머니를 뒤져보았는데도 손에 닿는 감각이 없는 것이 휴대폰을 화장실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미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지있었다. 지갑을 따로 소지하지 않고 다닌 지는 벌써 한참 되었으나, 이번 여행길에 필요할지 몰라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운전면허증과 분리수거를 위해 휴대폰 커버 속에다 상시(常時)로 꼽고 다니는 교통카드까지 휴대폰 커버 속 소지물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또 있었다. 휴대폰 내피(內皮)에 비상금으로 끼워놓은 현금 11만 원도 있었다. 고속도로의 마지막 구간인 영덕에서 도착하기 전에 회차로(回車路)를 찾아 차를 돌려야만 했는데 한참을 달려도 출구가 보이질 않았다. 동청송영양 IC에 이르러 겨우 회차를 해서 다시 동안동 IC로 내비게이션 구간을 설정한 후 역(逆)으로 고속도로를 탔는데, 문제는 청송휴게소가 차의 진행 방향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스러운 점은, 서둘러 휴게소에다 휴대폰 분실 사실을 일러둔 덕분에 이내, 화장실에 놓아둔 휴대폰을 찾아 보관하고 있다는 전갈(傳喝)이 온 것이다. 중간에 차를 잘못 내린 탓에, 먼 거리를 돌아서 고속도로 위로 다시 올라와 진행 방향의 청송휴게소에서 건너편 영덕 방향의 청송휴게소를 그저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0 여분 더 달려 동안동 IC에서 회차를 해서, 청송휴게소의 드롭탑에 들러 보관 중이던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쯤 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무료(無聊)할 때 유튜브를 드나들다 보면, 외국인 유튜버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놀라움을 소위 국뽕의 관점에 부응(副應)하여 올려놓은 실생활 소감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이를테면, 누군가 실수로 공공장소에 놓아두고 떠났거나 분실한 물건을 손대지 않고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거나,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해서 적극적으로 이를 되돌려 는 한국 사람들의 양심이나 심성(心性)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선행을 실제 베풀었거나,  같은 도움을 한 번쯤은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불필요한 생고생을 하긴 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내내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이처럼 휴대폰을 손쉽게 되찾은 탓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양심과 건전한 공동체 의식이 여전히 건재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은 오랜만의 숙면(熟眠) 길게 이어졌다. 몸이 피로해서 잠에 곯아떨어졌다기보다는 잠든 내내 정말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머리가 새벽 공기처럼 맑고 가벼우면서도 뒷목이 전혀 당기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 후의 깊은 잠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나약해진 마음을 치유(治癒)하면서 새로운 원기(元氣)로 몸을 충만케 해주는.


칼같이 추운 날, 꽃으로 피어난 상고대의 서늘한 아름다움이 오늘은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로 동해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 있다.


처형의 예순한 번째 생일, 환갑을 축하하기 위한 데코레이션
용궁 전통시장 입구. 아직은 한산하다.
전통시장 옆, 오래된 옛날 정미소,
용궁 전통시장 이벤트 존. 조형물 뒷쪽은 비닐 텐트로 하우징 되어 있다.
용궁 단골시장 본점 입구
공군 제16 전투비행단
전투비행단 앞 조형물
지난밤 사이 꽃을 피운 상고대
석송령 앞. 나무 가까이에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다.
석송령 2世 木
석송령 앞 수제 찹쌀떡집, 만수당 입구
만수당 안 광고 배너
만수당 전통수제 찹쌀떡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이 동해의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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