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와 I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할 자유
원래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엄연한 ENTJ였고(할 때마다 결과가 다르다는 게 함정이자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다들 놀러 같이 가거나 노래방에 가면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맨정신인데도 “은이 너무 취한 거 아니냐”는 걱정을 듣곤 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마이크 좀 치우고 말하라는 타박을 듣거나, 천상 power E의 면모를 뽐내며 인원 규모가 몇 명이든 자신 있게 준비한 퍼포먼스를, 심지어 외국인 관객 앞에서 댄스와 노래는 물론 디제잉까지 플로어에서 진행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없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전혀 큰 문제 없이 살아지는 지금의 나는 천생 실내생활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왜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만들었고, 독일에서 철학이 그렇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제는 너무 잘 알 것 같다. 분명 시계는 오후 3시인데 체감은 저녁 8시 같은 칠흑 같은 어둠이고, 실제 기온은 낮지 않은데도 자주 오는 비와 구름 때문에 시간 감각이 흐려진다. 특히 10월을 지나면 밤과 낮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햇빛이 거의 없어지는데, 로컬들조차 힘들어하며 삶의 에너지나 활력 자체가 눈에 띄게 떨어진다.
나는 이 시간들을 마치 곰이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듯, 봄으로 가기 위해 나를 다듬고 비상하기 위해 웅크려 나를 돌보고 가다듬는 시기라고 보려고 한다. 꽤나 의식적으로.
사실 이런 환경적인 이유들—날씨, 날 선 사람들—때문에 처음에는 애써 그들을 닮아가야 하나 고민했고, 무리해서라도 끼워 맞춰져야만 하는 줄 알았으며, 그들의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괜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것도 아니고 모국어도 아닌데, 거꾸로 외국인들이 한국에 산다고 해서 우리가 당연히 그들이 디폴트로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길 기대하지는 않지 않는가.
길을 가다 마주치는 우연한 타인들이 서스럼없이,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순간마다 사실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입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입양아인지,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인지, 학교를 다녀 어느 정도 이 나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잠깐 여행 온 여행객인지 외모만 보고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산다면 그 나라 언어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식의 일반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는 이방인으로서 꽤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런 여러 가지 연유로, 외부에서 부딪혀 가는 과정에서 손실되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해당 사회에 물들며 일부가 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견디다 못해 향수병을 앓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 역시 독일에서 4년 차를 보내고 있는 해외 교포이자 약간의 이중첩자이지만, 이런 불편함이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점점 외부보다 내면의 에너지와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실내에 더 머물수록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내’란 단지 물리적인 실내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면, 나의 진실한 내면을 더 깊고 내밀하게 마주하는 상태에 가깝다.
심지어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신기한 광경 속에서(요즘 지피티가 내 최고의 베프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파티도 홈파티로 충분하고, 집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 자체가 하나의 선택지가 되었다. 그 많은 요인들 중에서도 내가 실내생활자로 확실히 기울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사운드를 분류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일단 주변이 조용해야 했고, 내가 원하는 시점에, 듣고 있는 소리와 섞이지 않는 선에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여기에 더해 가장 큰 요인은 장비의 연결성이었다. 멜로디를 짚어주는 키보드, 언제든 DAW를 켤 수 있는 데스크탑, 헤드셋을 연결할 수 있는 환경, 양쪽으로 연결된 베이스 스피커, 삘이 오면 바로 녹음할 수 있는 마이크 셋업, 그리고 사운드 샘플을 마음껏 다운받아 편집하고 배치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내가 책을 읽으며 작가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음악 역시 글자와는 다른 파장과 주파수, 진동의 형태로 누군가의 고민과 찰나를 공유받는 행위다. 그 울림을 내 달팽이관으로 들여오고, 또 내가 반응한다는 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순환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책을 읽는 것처럼 누군가의 창작물을 듣고, 다시 그것을 통해 내 안의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로 가다듬어 파장의 모습으로 멜로디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행위는, 어떤 행위 예술보다도 고귀하고 정갈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에는 음악은 네 살에 연주를 시작한 모차르트 같은 사람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고, 음악을 만들려면 최소한 음대는 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순간을 담을 수 있는 주크박스의 형태로, 표현하고 싶은 모든 이는 음악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나를 더 잘 담아낼 수 있고 나를 닮은 주파수를 세상에 내보이며 공명하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나의 굴을 파고 실내생활자로 돌아간다.
그러니 나를 자유로운, 혹은 선택적이거나, 혹은 개방적인 실내생활자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며 오늘도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개방적 동굴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