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것도, 사는 것도 두려울 때 살아갈 수 있는 용기
발목이 꺾인 일이 있었고, 꺾인 발목은 또 꺾여서 결국에 인대가 찢어져 깁스까지 해야 했다.
인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깁스 뒤에 숨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보호막을 둘러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또 마침 코로나에 두 번째로 감염이 되었다. 외부에 돌아다니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는데도 코로나에 걸려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믿을 수가 없어서 자가키트를 세 번이나 할 정도였다.
"내가 코로나라니?" 코로나가 무척이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코로나로 나를 둘러대고, 일상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고통을 두르고 버거웠던 최근의 삶에서 조금은 벗어나 아프다는 합법적인 핑계(?)로 쉴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상처가 나고, 스스로도 면역력이 떨어짐을 느끼자마자 코로나에 걸렸다. 그리고 스스로 삶이 버거워서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여겨질 때 코로나에 걸렸다.
몸의 면역력도 삶의 면역력도 떨어지면, 바이러스가 침투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그리고 침투한 바이러스에 두들겨 맞으면서,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말이 얼마나 과분한 말인지, 통증과 속에서 죽을듯이 아프고나니까.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투정일 뿐란걸 알았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음을 절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다. 삶도 건강도 면역력이 떨어져서 더는 버티기 힘든 순간엔 때론 아픔이 보호막이 되기도 하고, 찢어진 발목에 깁스를 두르는 것이 버티게 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쓰는 것이 두려워졌다. 일을 하는 것도 두려워졌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도, 글도, 삶도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자기 확신'은 절망이 되어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버렸다. 일도, 삶도, 쓰는 것에서도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끊임없이 도피하고, 도피해서 현실을 잊어도 다시 현실은 나를 찾아왔고, 내 앞에는 해야 할 일과 살아야 할 삶과 견뎌내야 할 무게가 놓여져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소설로 피해 있었다. 소설을 보면 다양한 세계관과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상황이 놓인다. 그 상황과 세계관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겪고 있는 것들로부터 나를 구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설 완결까지 보고나면 다시금 현실은 매정하기만 했다. 소설만 보면서 살 순 없었으니까. 내가 소설을 쓸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소설에서만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지 않았고, 글을 읽을 수록 더 자괴감에 빠졌다. 잘 쓰는 글을 읽을 때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를 경멸했다. 그림을 그려도, 글을 써도 나는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냥 그리고 쓰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냥'과 '잘'은 너무나도 간극이 크다. 그런 나에게 의사선생님은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 했다. 잘 하지 않으려고 하면 글로부터, 삶으로부터, 그림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해질 수 있을까?
나는 조금이나마 자유해질 수 있도록 엉성하고, 매우 감정적이고, 서투르고, 엉망인 글을 쓰려 한다. 확신에 찬 글이 아니라, 확신 없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서 부끄럽고 취약한 글을 쓰고자 한다. 내 삶에 있어서도 나는 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 취약하고, 나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하고, 불안에 겨운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것만 같은 시간에 내가 있다는 것. 결국엔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이니까. 어떻게든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분명한 확신이 없어도.
발깁스를 했을 때, 그럼에도 멈뭄이 산책을 나가야 했다. 멈뭄이는 실외배변을 하는 아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됐다. 의사선생님은 산책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절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깁스한 발목으로 절뚝거리며 멈뭄이 산책을 하곤했다. 내 꼴이 매우 처량했지만, 멈뭄이를 위해서 나는 불편함도 부끄러움도 감수해야만 했다. 절뚝거리면서 산책을 할 때 느꼈던 것은 절뚝거리며 사는 삶, 온전하지 않은 삶이 그 자체로 용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산책을 포기 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은 나약하거나 연약한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곤 한다. 아픔이나 헛점을 보이면 상대를 공격할 구실이 되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온전하지 않아도 비틀거리며 거꾸로 살아도, 때론 뒤틀려진 마음을 가지고도, 절뚝거리면서 엉성하게 발을 디뎌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안될까?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 연약함을 부풀려서 강해보이지 않아도, 강하지 않은 채로.
의사선생님도, 나를 보는 몇몇의 사람들도 나에게 "너는 인지 왜곡이 심해.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왜곡된 생각으로 모든 것이 뒤틀려진 나를 앓아도,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고, 나의 병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앓은 채로 살아 있다. 앓고 있는 것이 병이든, 삶이든살아 있으니까, 계속해서 용기를 내봐도 되지 않을까. 산책을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멈뭄이에게 산책은 필수적이고, 사랑하는 멈뭄이를 위해서 내가 아픈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살아갈 이유를 얻곤 한다. 산책을 해야 한다는 건, 내가 일어나서 발을 디뎌야 한다는 것이고, 힘들고 지쳐도 밖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멈뭄이에게 필요하다는 것이고, 멈뭄이를 홀로 둘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우리에겐 각자 나름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용기가 되어줄 무언가 하나라도 있다면, 아프고 괴로운 삶에 덧댈 보호막이 되곤한다. 나에겐 멈뭄이가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게 무엇일까? 나는 이대로도 괜찮다며 다독이며 쓰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