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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Jul 04. 2023

늑대가 나타났다

비주류 존재로서 딩크족으로서, 여성운동가로서 겪는 어려움과 긍지

늑대가 나타났다

멈뭄이와 산책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멈뭄이를 보고 "늑대다!", "저게 늑대예요?"이다.

어린아이들 눈에는 멈뭄이가 '늑대'로 보이는지, '늑대'라고 많이 불려진다.(어린아이들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늑대'가 주는 차별적 인식 또는 공포감. 어쩌면 그것은 사회에서 차별적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 대형견이 유기견으로 더 많이 버려지고, 중 대형견에 대한 혐오가 더 크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문득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곡이 생각이 났다. 가사를 보면 "마녀가 나타났다", "폭도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단이 나타났다"라는 가사가 있다.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 달리 말해 비주류라는 건, 정상을 벗어났다고 비정상으로 규정짓는 존재라는 건, 또는 자신들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라는 건 늘 이러한 '오명'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여성운동, 성평등 운동을 하는 활동가로서의 삶이 그렇다.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에 의해 늘 재단되고, 오명을 뒤집어쓰고, 해명해야만 하고, 늘 끊임없이 그것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기득권 세력에 의해 굴복되거나 좌절된다. 지금 속한 단체에서는 내부에서 더 많이 공격을 받고 '불온한 존재들'로 낙인찍히고 있다. 우리의 운동이 "불온한" 것이 되었다. "성평등"이라는 단어까지 빼앗길 위협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성평등",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지워내면 괜찮은 것일까?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온건한 단어'로 표현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언어 논쟁이 아니다. "양성평등"을 쓰기 원한다고 하면 얼마든지 써줄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용어 사용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운동의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부정당하는 것이기에 단순하지 않으며 '성평등'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로서의 '단어'인 것이다. 


"탕종, 탕종 나는 단어 하나라도 나를 지킬 수 있다"(『단어의 집』, 안희연)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키기 위한 단어인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우린 "늑대"이고, "폭도"이고, "마녀"이고, "이단"이다. 우리 멈뭄이도, 작고 귀여운 품종견이 아니라서, 야생미가 넘치는 야수적인(?) 근본 없는 시고르잡종 믹스견이라서 보이는 그 자체로 "늑대"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늑대'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작은 바람이다. 내가 '늑대'로 불리는 뭄이와 서로의 바운더리가 되어주는 것.



북이나 실컷 쳤으면요

어머니 북이나 쳤으면요
내 마음의 얇은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내가 밥 벌어먹고사는 사무실의 낯은 회색 지붕이 
뚫어져라 뚫어져라
그래서 햇살이 칼날처럼 이 회색의 급소를 찌르도록
어머니 북이나 실컷 쳐봤으면요 <최승자詩, '북'>

내가 밥 벌어먹고사는 것, 그것이 운동과 연결되면 나는 '북'을 실컷 쳐보고 싶다.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뚫어져라 뚫어져라, 모든 생명체가 고통받지 않도록 차별과 혐오에 맞서 북이나 실컷 치고 싶다.

결국에 나는 "늑대", "폭도", "마녀", "이단"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사회도 세상도, 조직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실제로 처참하게 경험했지만,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세상을 구하진 못해도 내 앞의 지렁이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글이었는데, 우리가 구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건 어쩌면 매우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은 생명체라도 구해낼 수 있다면.. 사실 '지렁이'는 인간들에게 많이 부정되는 존재이고, 비주류이다. 결국 비주류가 비주류를 구해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라도 서로를 구원하는 세상엔, 언젠가 비주류가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더 울려 퍼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가 여성운동을 하면서 동물권까지 확대되어 동물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을 때, 비건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조금이나마 내가 먹지 않음으로써 구해낼 수 있는 생명을 생각한다. 물론 나 혼자 먹지 않는다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든 생명을 구해낼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도살장에 끌려가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을 '먹지 않음으로써' 애도할 수 있다면, 그건 '구해낸 일'이 아닐까. 복날에 삼계탕을 먹지 않는 것이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는 실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난 그렇게 내가 칠 수 있는 한, 난 내가 칠 수 있는 북이나 마음껏 치고 싶다. 차별과 혐오라는 급소를 찌르고, 모든 생명체가 안전하고, 위협받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조금이나마 울리는 파장이고 싶고, 소리이고 싶고, 이 세상을 적시는 빗줄기이고 싶다. 더 세게. 더 크게.


행복은 알아서 느낄게요

딩크족인 것을 밝혔음에도 사람들은 내게 아이를 낳는 것을 조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다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나는 평생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 행복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내가 욕심부리는 행복은,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외엔 없으니까 말이다. 내 삶 하나 사는 게 아프고, 괴롭고, 고단한데 그 삶 속에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 행복은 욕심내고 싶지 않다. 나는 아이가 주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개가 주는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개가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만, 개도 내겐 자식 같은 존재이기에 나를 살게 한다. 격려와 조언으로, 나의 행복을 걱정해 주는 것은 좋지만 사양하고 싶다. '저출생'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쳐대는 세상 속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나는 '늑대'이고, '폭도'이고 '마녀'이지만, 늑대라 폭도라 마녀라 행복한 것은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나름의 행복을 또 다른 형태로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멈뭄이와 함께하는 삶이 그렇다. 개와 사람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멈뭄이는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의 케어와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멈뭄이 덕분에 케어를 받기도 한다. 매일같이 해야 하는 산책을 통해 조금씩 건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생기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이 세상에 멈뭄이를 홀로 둘 수 없다는 것, 내가 없으면 멈뭄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예전의 나는, 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면 죽고 싶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밑을 바라다보며 뛰어내리는 상상을 계속했고, 차도로 뛰어들고 싶다는 깊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많았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괜찮을 거라고. 늘 죽음을 꿈꿨다. 

그런데 이제는 차에 뛰어들면 내 곁에 있는 멈뭄이가 죽을까 봐, 다칠까 봐 뛰어들 수 없고 내가 죽으면 혼자 남겨질 멈뭄이 때문에 멈뭄이를 두고서 세상을 떠날 수가 없다. 돌볼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가 주는 행복을 평생 느끼지 못하더라도, 개가 주는 행복만 평생 느껴도 나에겐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겐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나의 행복을 걱정하는 조언은 사양하고 싶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행복을 느끼는 것은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꼭 '아이'에게만 한정된 행복을 누리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슬픔을 지연시키기 위한 믿음

나는 어렸을 때, 12살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다. 혼자 방에 갇혀서 매일 같이 외롭고 고통스럽고 아팠다. 어른이 되면 아픈 삶으로부터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30살이 넘어도 여전히 나는 약하고, 나약하고, 불안하다. 우울증 약으로 연명하는 삶은, 어쩌면 그것이 잠시 '슬픔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연시킬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정현우의 <소멸하는 밤>에 나오는 "조감도"라는 시에 "턱을 괴고 불 꺼진 숲을 슬픔을 지연시키기 위한 믿음이라고 읽는다"라는 시구가 나온다.  나의 삶은 늘 그랬다, 슬픔을 지연시키기 위해 자해를 할 때도, 폭식을 할 때도, 거식증이 되었을 때도,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있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것이 잠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어쩌면 그렇게 지연시켜 온 삶에 그럼에도 나를 살게 하는 어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죽음을 지연시켜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믿음을 가져보고 싶다. 삶에 어떠한 기대할 것도 없다 하더라도, 기댈 수 있는 삶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각자 모습대로 '늑대'이든, '폭도'이든, '마녀'이든 있는 그대로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고 싶고, 그런 삶이 모두에게 주어지도록 내 세상에선 '지렁이'뿐이더라도 구해낼 수 있는 생명은, 존재는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겨 죽을지라도 좋을 것 같다. "비취색 그림자가 흔들 릴 때마다 늪 속에 잠겨 죽어도 좋겠지", "기쁨으로 괜찮아질 때까지"(정현우, <소멸하는 밤>, "조감도" 중) 기쁨으로 괜찮아질 때까지. 소멸하지 않고 살아 있기를 바라며 모두의 구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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