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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Feb 11. 2023

<멈추어라, 순간이여!>

앙드레 브라질리에 특별전

제주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계시는 고운 작가님, 마름모 출판사 대표님인 고우리 작가님. 거기에 나까지 셋이 뭉쳤다. 모두 <세상의 모든 문화> 뉴스레터 필진인데, 아무래도 정지우 작가님을 주축으로 알음알음 모이다 보니 성향도 비슷한 듯싶다. 겨울 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한 달 살기 중인 고운 작가님을 그냥 보낼  없었다.


고운 작가님한테 대뜸 메시지를 남겼다. 제주에 내려가시기 전에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혹시 전시 구경하는 거 좋아하시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이다. 고운 작가님은 내가 보낸 전시회 링크를 보고는 그의 화풍을 좋아한다며 시원하게 오케이 했다. 며칠 뒤 고우리 작가님도 여차저차 어찌저찌하여 슈루룩 뚝딱 이 만남에 함께 하기로 했다.


전시회에 고우리 대표님은 7분 일찍 도착하고, 나는 7분 늦게 도착하고, 고운 작가님도 거기에 쪼금 더 늦게 도착했다. 고운 작가님은 큼지막한 이목구비에 도시 여성 같은 외모의 아리따운 선생님인데, 어쩐지 나만큼이나 자주 길을 잃는 사람인 것 같았다.


오후 2시가 좀 넘었을 무렵, 우리는 <앙드레 브라질리에 특별전>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는 90세가 훌쩍 넘은 프랑스의 현역 화가인데 샤갈이나 고갱하고 같은 시대를 지낸 마지막 화가라고 한다. 파란색, 초록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밝고 경쾌한 색을 주로 사용해서인지 보는 내내 편안하게 브라질리에가 만들어 놓은 그림 속 세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워낙 색감도 아름답고 꿈처럼 몽환적이기도 한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이 좋았다. 한 그림에 멈춰 그 세상 속에 내내 머물고 싶기도 했다. 특히 전시 초반에 음악을 소재로 한 그림들에서 그랬다. <현악 오중주>라는 그림에서는 연주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의 주변을 꽉 채운 주황빛 배경, 거기에 연주자들의 몸 가까이에 그려진 주황색의 굵은 선은 강렬한 음악 소리를 고스란히 그림에 담은 듯했다.

연주자들의 표정은 옅은 선으로 흐릿하거나 없었고, 얼굴의 형태를 그린 선도 번진 물감에 무색할 정도였는데, 연주에 심취한 무아의 경지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았다. 놀라웠던 건 브라질리에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명확한 선을 그리기보다 번지거나 흐트러지게 그리거나 했는데 이 모두 작가가 구체적인 형상과 순간에서 따온 의도적인 추상화인 듯했다. 실제로 마주한 세상을 자신의 감정과 인상을 순간적으로 기억해 그린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그 순간의 감정과 인상을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해 두었다가.


브라질리에의 그림은 어디 하나 뭉그러지거나 어둡지 않고 조화로웠다. 주로 검푸른 빛을 사용한 <수욕도>는 어두운 밤에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렸음에도 관능적이거나 관음적이라기보다는 맑은 물에 기쁨이나 찬사를 온몸에 흐르게 하는 것처럼 충만하고 풍요로웠다. 그에게는 어두운 색마저도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나무, 말, 해변, 사람, 숲 등의 소재를 이용한 건 대부분의 작품이 비슷했지만, 모든 그림에서 다른 유토피아의 모습이 열리는 듯했다. 희망과 기쁨이 단조롭고도 풍요롭게 흘렀다. 역설적이게도 브라질리에는 이런 감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 이유가, 절망과 투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쁘고 아름다운 세계만을 고집한 이유는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 절망의 순간과 ‘투쟁’하기 위해 매 순간 악착같이 풍요, 기쁨, 환희를 그려낸 것이다.

작품이 유독 아름다워 넋을 놓고 보다가 브라질리에가 어떤 절망, 막막함, 고단함에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지 가늠할 수 없어 슬퍼지기도 했다. 그가 작품에 담은 세계처럼 나도 그런 세상을 글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섭고 아픈 세상에도 생동하고 아름다운 반짝임이 있다고 말하는 글 말이다. 즐겁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어둠과 슬픔의 세계로부터 혼자만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그건 투쟁이고 용기라고 왠지 브라질리에가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같이 있던 작가님들을 놓치고 말았다. 전화해 보니 작가님들은 이미 굿즈 쇼핑까지 마치고, 지하에 카페를 찾으러 내려간 상황.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가 포스터 한 통씩 구매한 작가님들을 만났다. 전시를 다 본 작가님들이 조금 더 따뜻하고 편안해 보였던 건 기분 탓일까. 나도 얼른 다시 올라가 마음에 들었던 굿즈를 사고 어쩐지 기쁜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을 나섰다.


*

그의 시선에는 어떤 니힐리즘이나 우울함도 깃들지 않는다. 이는 그가 삶의 고통과 무게를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회피하기 때문이 아니다. 회화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빛나는 순간과 생생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 이유로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미덕에 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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