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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y 02. 2024

딸, 아들?

"나도, 딸!"


임신 중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던 때였다. 단양 소백산 언저리에서 쉬다가 시내 시장에서 마늘빵을 사겠다고 줄을 서 있었다. 얼마나 맛있는 곳인지 근처 채소 노점 할머니들은 마늘빵 인파가 귀하게 따온 채소를 판매할 수 없게 막고 있다며 연신 인상을 찌푸리셨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젊은 마늘빵 사장님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조그만 뾱뾱이 신발을 신은 꼬마 아가씨의 손을 잡은 남자가 우리에게 “닭강정 줄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마늘빵 줄이라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남편은 아빠 손을 꼭 잡은 꼬마 아가씨에게 눈을 떼지 못하더니 대뜸 “나도, 딸…”이라고 읊조리는 게 아닌가.


성별 확인을 하기 전, 주변에서는 딸이었으면 좋겠냐, 아들이었으면 좋겠냐고 자주 물었다. 남편은 의젓하게 성별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건강하게 태어나주기만 하면 된다고 정답 같은 대답을 했다. 한 지인은 성별 확인을 한 날, 아들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의아한 듯 새초롬하게 웃었다. 그러던 남편이 갑자기 ‘딸’이라는 단어를 불현듯 간절하게 입 밖에 낸 것이었다.


이미 아들인 상황에서 딸을 낳아줄 수도 없으니 난감하면서도 남편의 분홍빛 속내가 귀여웠다. 하지만 어쩐담. 뱃속에서부터 한 크기 하는 것이 딱 남편 닮은 아들인 게 확실했다. 그리고 정말로 남편의 코, 입매, 볼, 배 둘레까지 아빠를 똑 닮은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남편은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도 핑크색 콧물 흡입기와 노랑 커튼을 샀다.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빌려 쓰는 거라며 깨끗하게 써야 한다고 신생아 오빠(?)에게 단단히 일러두기도 했다. 아들, 딸 상관없다던 남편은 적잖이 아쉬워 보였다.


그러던 남편이 이제 출산 136일차. 4개월이 꼬박 지나자 변했다.


아기와 거실에 앉아 있으니 남편이 “우리 아기 선물 줘야겠다!”라고 하며 싱글벙글 나타났다. 뭔가 하고 기다리니 남편은 아기 앞에서 꽃받침을 하고 “아빠 얼굴!”을 외친다. 아기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활짝 웃는다. 꼭 닮게 웃는 부자를 보면서 나도 웃는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아기를 안아 달라고 하니 남편은 얼른 수유 의자에 앉아서는 헤벌쭉 웃으면서 두 팔을 벌린다.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얼른’을 세 번 외치는 남편. 아기가 찾아온 뒤에 연애를 하면서, 신혼 생활을 하면서 보지 못했던 남편의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한다. 생각보다 더 애교가 많고, 사랑이 많고, 다정하다.


남편이 이렇게나 헤벌쭉 웃는 걸 그동안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마찬가지로 내가 종종 아기를 보면서 웃고 있으면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도, 사진을 찍기도 한다. 아마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처음 보는 서로의 가장 행복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출산 후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가볍게 답했다.


"정말 행복해."


어쩌면 육아라는 건 행복의 진폭을, 빛깔을, 향기를 모두 깊고, 진하고, 그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남편도, 나도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충만감과 행복감에 헤엄치는 요즘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아기라는 바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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