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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스타그램은 지웠지만 여행 자랑은 하고 싶어.

너네가 파업해도 나는 간다.


1.

몇 달 전 나는 인스타그램을 삭제했다. 디지털 디톡스 같은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딱히 SNS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인생은 낭비하라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삶이라는 기회가 주어질 리 없다. 그냥 어느 순간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싫어졌다.



2.

나는 인스타그램 중독자였다. 소위 말하는 인스타충이었다. 자랑할 것이 생겨서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하는데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자랑할 것을 찾아다녔다. 간혹 새벽에 눈이 떠져 잠이 안 오면 30분 정도 동네를 뛰고 미라클 모닝이라는 캡션과 함께 인스타에 올렸다. 그리고 올린 게시물이나 스토리를 계속 돌려봤다.



3.

인스타그램을 지우고 보니 문제는 SNS 따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일상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돌려보듯 내가 브런치에 쓴 글을 계속 반복해서읽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는 듯했다.



4.

생각해 보면 난 관심 종자로 태어난 게 아닌가 싶다. 허영심만큼 나와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도 전에 인생 책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제목이 멋있었으니까. 읽지 않아도 인생 책일 것 같았다. 다행히 책은 좋았다.



5.

스물아홉 살, 나는 루프트한자 A359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동그란 창문 너머에 펼쳐진 주황색 하늘을 찍으며 인스타그램을 지운 것을 후회했다. 자랑하고 싶었다. 알리고 싶었다. 외치고 싶었다. 나 여기 있다고. 나 좀 봐달라고.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냐고. 메모장을 켰다. 글을 썼다.



6.

유럽 여행 하루 전, 체크인을 하기 위해 나는 루프트한자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체크인 버튼 위 작은 문구가 보였다. Major disruption expected due to union strike… 대충 독일 주요 공항의 보안검색 직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 파업하는 건 좋은데 왜 내가 가는 날 파업하냐고.



7.

여행사를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절대 돈 아낀다고 호텔이나 항공을 환불불가 옵션으로 예약하지 말 것. 모든 여행지가 그렇지만 유럽은 특히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돈 아낀다고 이번 여행 모든 호텔과 항공을 환불불가로 예약했다. 똥줄이 탔다.



8.

루프트한자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과 금방 전화가 연결되었다. 직원은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수화기 너머들려오는 주변 소리는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급하고 시끄러웠다.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 때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인생의 진리다.



9.

직원은 판결문을 읽어주었다. 피고인은 멍청하게도 한 달이나 가는 여행의 모든 호텔과 항공을 환불 불가로 예약했다. 이는 피고가 그동안 여행사를 운영하며 수많은 고객들에게 한 조언과 위배되는 행동임으로 상당히 죄질이 불량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한 번에 한해 피고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피고는 파업이 일어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아닌 뮌헨 공항을 거쳐 바르셀로나로 입국할 수 있다.



10.

그렇게 나는 스페인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으로 본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인스타그램이 아닌 브런치에 자랑하자고. 제목은: 인스타그램은 지웠지만 자랑은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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