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손목시계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작고 짙푸른 녹색의 알맹이를 한 작은 손목시계가 있다. 약 12년 전 가족이 미국에서 사용하던 낡은 것으로, 기존의 보기 좋은 녹색의 가죽줄은 진작에 검정 가죽줄로 교체하여 내가 쓰고 있다. 시계는 브랜드, 라는 인식이 강하기도 하지만 난 별달리 신경쓰지 않는다(스니커즈는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지만...).
계절 중 겨울이 지나고 확실히 날이 따뜻해지고 있다. 나에게 왔던 칼바람 부는 어둠이 서서히 몸을 움추린다. 와중에 혼자 이사도 하고 집기도 마련했다. 정신이 다른 곳으로 향하던 와중에도 중고제품을 사용하며 최대한 직접 수리하고 생활 속 내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참에 생각한다. 실은 몇 일 전부터 생각해왔다. 난 해냈고,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걷지 못하겠으면 몸이라도 가누어 앉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여하튼, 작고 오래된 녹색의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오늘도 착용했다. 솔직히 스테레오 타입의 강남 회사원 착장 악세사리로 사용하고 있어서, 이것으로 시간을 확인하진 않는다. 그러다가, 오늘 출근길에 자켓 속의 스마트폰을 꺼낼 수 없을정도의 지옥철을 탔다. 도착역을 알려주는 전철 내부의 스크린도 군중의 머리통으로 가려져 볼 수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고, 문득 손목시계를 차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고 있던 왼쪽 손목의 셔츠를 살짝 걷어올렸다.
분명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섰는데, 손목시계는 내 예상보다 10분 정도 이른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 내가 오늘 좀 일찍 나왔나? 이 전철이 빨리 달리나? 운전이 좀 거칠긴 하다만... 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내 손목 위의 시간은 아날로그 시계가 알려주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시계 약이 다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놀랐다. 이 시계 줄도 교체하고 약도 새로한 게 지난 가을 즈음 이었는데. 이후 이 시계를 몇 번 착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간 오차가 생길 만큼 손목시계의 배터리가 다 되었나.
머릿속으로 내가 언제 약을 갈았었지- 하며 시간을 되짚어보다가, 내가 지내온 반 년간은 지난했고 고여있는 늪으로 뒤덮혔던 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었어서, 세상도 그렇게 숨막히고 느리게 움직이는 줄 알고 살아왔던 것 같다.
손목시계는 일정히 가는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되어도, 그때마다 움직일 수 있는 속도로 그저 시간을 받고 또 보내고 있었다.
약이 다 된 내 낡은 손목시계를 보며, 아직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괜찮아 질거다, 시간이 약이다, 라는 소리는 위로의 말도 못되고 해서도 안된다고.
나는 아팠구나. 몸부림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어떤 고통과 그 일들으로부터 정신차린지 얼마 안되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면서, 오늘 만원 지하철에서 마스크 뒤 내 코는 빨개졌었을 것이다.
현재 난 어쩌면 이겨내고 있는 어느 시간들의 여파로 감정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 낡은 손목시계 덕분에 오늘 나에게 올곧지만 날카로운 잣대보다, 힘내- 라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지금은 커피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