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 May 03. 2021

05. 당신은 어떤걸 믿나요

생전 처음 사주를 봤다.

 몇 주전, 친구 한 명이 제주도에서 가끔씩 사주를 잘 보는 도사가 이번에 서울에 온다며 같이 보러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태어나 한번도 사주를 본 적이 없었고, 잔잔바리로 요란떠는 내 속과 함께 사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 그러겠다고 답하였다. 꽤 유명한 도사라서 위치와 시간을 예약해서 만나야 해서, 친구가 우리의 사주스케줄을 잡아주었다.


 약속 당일, 퇴근 후 강남 어느 카페에서 도사와 친구와 나, 셋이 만나서 사주를 보기 시작했다. 그 도사는 이름, 생년월일을 묻고 스마트폰에 입력하더니 뭔가를 출력해서 프린트 해 온 양식에 한자와 한글을 적더니, 이러저러한 원리와 글자가 갖는 의미 등을 설명해주며 우리 둘의 사주를 봐주었다.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처음에 나는 그 도사의 인상과 분위기가 별로였다. 그냥 상당히 피곤한 직장인처럼 보였다. 좋은 기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도사가 내 첫 사주를 봐준다라...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사주 내용도 별로 특이한 부분이 없었고(다행인건가?),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선명해지는 효과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경험한 것에 만족하고, 앞으로도 지금 하고 싶은 것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돌봐가며 지낼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날 밤 사주 내용보다 더 마음에 남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1. 사주가 끝나고 지쳐보이는 도사에게 나는,

'이제 퇴근하시네요, 오늘 많이 바쁘셨죠? 눈이 빨가세요.'

'아..그래요? 오늘 아침부터 그룹으로 사주보고, 하루종일 바빴어요.'

'저희가 마지막 스케줄이셨을테니, 얼른 좀 쉬셔야겠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이 짧고 별다른 내용없는 대화가 왜 기억에 남냐면, 내가 편안히 스몰토크라는걸 시작하고 주도했기 때문이다.


2. 친구와 함께 햄버거를 먹은 기억. 사주가 끝나고 상당히 굶주렸던 우리는 햄버거세트를 테이크 아웃해서 야외 큰 나무아래 벤치에 앉아서 허겁지겁 먹었다. 먹는 동안 친구와 두런두런 나눈 대화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기분좋게 시원했던 날씨와 도시 백색소음이 머릿 속에 남아있다.

 또한 직장 때문에 피로함과 깊은 고민이 잔뜩 묻어있는 친구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꽤 오랜기간동안 지쳐있는 친구가 걱정이 되지만, 최근에 좋은 날씨에 가까운 곳으로 바람을 쐬러 다녀왔다고 한다. 좀 괜찮아졌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전화 한번 해봐야지.



 글로 적고보니, 나에게 주변을 살피고자 하는 태도와 그럴 수 있게 하는 여유를 가졌던 것이 마음에 남았나보다. 여유를 갖는 방법을 몰랐고, 솔직히 여유라는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지내왔다. (경제적 측면이나 어떤 권력구조에서 비롯되는 그런 오만한 여유 말고... 이제 그런건 여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된 것 같다. 물론 환경과 사람으로 인해 모든 부분이 계획한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잘 지낸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화가 난다, 화를 낸다, 말을 한다, 도움을 청한다... 이런 부분을 결정하는 주체를 나로 하였다.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결정하는 건 본인히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불과 수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자기 검열과 반성, 주변 의식을 배려랍시고 끝도 없이 날 괴롭히며 중심 없이 살아온 시간이 많다.


 그러나 한번 주체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 마음 속의 굴곡과 어두운 시간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들이 더이상 두렵지 않다. 그것들이 이따금 나를 괴롭히려 들 때마다 이제는 어떻게 나의 현재를 지킬지 알고 있다. 맹렬한 슬픔과 강한 좌절, 반나절의 혼자만의 시간, 머리를 비운 춤사위, 그리고 좋은 술과 사람과의 대화가 있으면 나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포옹이 곁들여지면 더할나위 없겠다).

 이제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는다는 걸 겪으니, 많은 부분이 편안해 진다. 그래서 어떤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있는 것 같다. 



 잘 할 필요 없다. 뭐든 책임감을 갖고 하면 된다. 못해도 괜찮다. 다 망쳐버리면 욕 좀 먹고 다시 하면 된다. 물론 다시 안해도 된다. 무너져서 한동안 못 일어나도 괜찮다. 

 이걸 알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일을 만나야만 했었네. 꼭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경험도 많지만, 어쩌겠어 이미 지나온 시간인걸. 이제 성공한 인생을 사는 유명인사의 조언이나, 주변의 시덥잖은 의견이나 피드백보다는, 지금까지 살아내고 있고 앞으로 또 살아갈 나를 믿는다.



 고마운 얼굴들이 쇽쇽 떠오른다. 어쩐지 고마운 주말이다.


 5월엔 공휴일이 몇 개 있다. 힘이 난다!


작가의 이전글 04. 내 손목시계 시간이 맞는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