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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y 15. 2024

46 - 커피머신 찌꺼기통

부품이 없어졌어요

메신저가 울린다.

  익명 제보자 : 얼굴 사원님 안녕하세요.

  그 : 네 안녕하십니까!

  익명 제보자 : 아 네, 커피머신 관리해주시는 거 맞나요?

  그 : (?? 애매하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익명 제보자 : 저희 층 커피머신 필터가 없어져서요.

  그 : 없어졌다고요?

  익명 제보자 : 네, 원래는 원두 찌꺼기를 담는 통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어요.

  그 : (어쩌라는 건가 싶지만) 누가 부품을 버렸나요?

  익명 제보자 : 모르겠어요. 오늘 보니까 없어져있어서. 조치해주실 수 있나요?

  그 :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난 뒤, 그는 해당 커피머신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다. 한 달 전쯤 그가 '커피머신 메뉴얼'을 제작하여 부착한 바로 그 커피머신이다. 


 문제의 현장에 도착하니, 커피머신 주변에 까만 원두 가루가 흩어져 있다. 물받이 부품을 잡아 밖으로 끄집어낸다. 원래라면 물받이 부품 위에 있어야 할 원두 찌꺼기 통이 없다. 찌꺼기 통이 없으니, 원두 찌꺼기가 내부에서 조금만 쌓여도 흘러내린 것이다.


 전화를 받았을 당시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참담한 현장을 직접 마주하니 그도 한숨이 나온다. 그는 사업지원팀 옆 커피머신도 매일 청소했는데, 아주 가끔 캡슐받이 통이 없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 부품이 사라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범인을 한 번 잡고 난 후로는 대략 이해가 되기 시작한 그다. 엔지니어들이 사용하는 커피머신의 경우는 새 제품인 데다 그가 메뉴얼까지 만들어서 붙였으므로 한동안 민원이 잠잠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기가 무섭게 민원이 터졌다. 꽤 커다란 부피에, 나름 존재감을 풍기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원두 찌꺼기통이 통째로 사라져 있다. 분명 누군가가, 원두 찌꺼기를 버리는 과정에서 그냥 부품을 그 자체로 쓰레기통에 던졌을 것이다. 



 이는 분명히 메뉴얼에 언급해놓은 내용이다. 메뉴얼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커피머신의 부속을 그대로 버린 이 상황이 그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아직 열정을 가진 신입사원 초기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멕가이버가 빙의한 마냥 기분이 좋다. 그는 남자의 기술, 활동적인 것을 좋아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에서도,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며 끼워 맞추어 기형적인 기쁨이 발현된 모양이다.
 
  1) 임시 찌꺼기통 제작

 그는 탕비실을 돌아보다가, 딱풀을 모아서 담아놓은 네모난 상자를 발견한다. 물받이 위에 올린 상태로 커피머신 내부에 넣어야 하는데, 상자의 높이가 너무 높다. 그는 커터칼로 상자를 잘라, 높이가 낮아지게끔 조율한다. 


  2) 방수 처리

 커피머신의 특성상, 원두 찌꺼기에는 분명 수분이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종이 상자를 그냥 올려두었다가는, 원두 찌꺼기의 수분을 흡수해서 너덜너덜해지리라. 그렇게 되면 원두 찌꺼기를 버릴 차례가 된 이용자가, 물을 머금어 너덜너덜해진 종이 박스까지 쓰레기로 취급하여 또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질 것이다. 그는 황토색 박스 테이프를 겹겹이 붙여서 종이 박스에 코팅을 한다. 실험해보니 성능은 훌륭하다.




 기쁨에 취한 그는, 커피머신 보수 작업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가 민원이 발생했고, 이는 그의 기분을 여지없이 박살내놓는다.


  익명의 제보자 2 : 안녕하세요. 커피머신 원두 찌꺼기통이 없네요. 구매에 얼마나 걸릴까요?

  그 : 아, 구매 말씀이십니까?

  익명의 제보자 2 : 네, 누가 임시방편으로는 해놨는데, 저대로 계속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아마 해외 제품이라 부품 배송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처리 요청드려요.

  그 : (...) 네


 그렇게 잘 알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품이 없어진 커피머신은, 유럽의 제조업 강국에서 제조한 모델이다. 어찌어찌 한국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 연락한다. 재고를 확인하여, 부품이 있으면 바로 배송이 가능하나 없을 경우에는 수입 과정으로 인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의 업무 태도에서 조금씩 영혼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잠시 뒤 전화를 받는다. 다행히도, 부품 재고가 있다고 한다. 그는 아예 두 개를 구매해서, 똑같은 불상사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다. 부품은 얼마 뒤 도착한다.



 도착한 부품을 들고, 그는 문제의 커피머신이 있는 탕비실로 향한다. 부품 하나는 서랍장에 보관하고, 하나는 커피머신에 결합할 것이다. 그가 손수 제작한 임시방편, 현재까지 원두 찌꺼기를 잘 보관하고 있는 기특한 녀석은 은퇴시켜 그의 책상에 전시라도 할 생각이다. 

 커피머신 물받이를 잡아당겨 분해한다. 그런데, 그가 손수 제작하여 올려놓은 부품이 없다. 딱풀 박스를 커터칼로 자른 뒤 박스 테이프로 방수 처리를 한 녀석이 사라졌다. 그의 눈썹이 꿈틀한다. 탕비실 쓰레기통을 뒤졌지만, 그의 작품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져온 부품 하나는 결합하고, 여분은 서랍장에 보관한다. 마지막으로 단체 메신저방에, 커피머신 부품은 버리지 말라고 공지한다. 이후 그가 총무 업무에서 손을 떼는 시점까지, 커피머신 필터가 분실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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