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3, 승진누락
2. 승진년도
입사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그는, 모르는 것이 아주 많다. 몇 년을 다녀야 승진이 되는 것인가.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진급에 필요한 년수가 직급마다 다르다고 한다. 회사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돌아가는 모양새가 군대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일병 진급, 상병 진급, 병장 진급 같은 느낌이다. 그가 군에 있을 시기에는 이등병 3 - 일병 7 - 상병 7 - 병장 4 로 총 21개월이었다.
불편하지만 인사팀에 문의하여, 진급에 필요한 근속년수를 알아낸다. '사원 4년, 대리 5년, 과장 5년, 차장 5년' 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다른 회사에서 이직해 온 경력직이 아니란 전제 하에, 이 회사에서 처음부터 시자한 과장은 최소 10년차다. 사업지원팀은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과장과 차장이다. 그와 사업지원팀 사이에는 최소 10년이라는 갭이 있다.
출생년도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승진년도는 분명 인사팀에서 관리하고 있을 만한 데이터다. 굳이 입사년도를 하나하나 기입하여 역산할 것이 아니라, 정리되어 있는 데이터만 받으면 깔끔할 일이다. 그는 인사팀에 이를 추가로 요청한다.
그 : 안녕하세요. 사업지원팀 하얀 얼굴 사원입니다.
인사팀 : 네, 안녕하세요.
그 : 네, 추가로 요청드릴 것이 있어서요. IT사업부 직원들의 승진년도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인사팀 : ... 어떤 것 때문에 필요하시죠?
그 : 사업부 내부 관리 차원에서, 승진대상자 등을 미리 관리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인사팀 : ... 여쭤보고 알려드릴게요.
그 : 네!
잠시 후
그 : 전화받았습니다.
인사팀 : 네, 얼굴 사원님
그 : 네!
인사팀 : 요청하신 정보는, 여쭤보았는데 제가 그냥 공유드릴 수가 없습니다. 필요하시면 협조전을 써서 요청하라고 하시네요.
그 :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협조전. 회사 생활이 약 6개월차에 접어들고 있는 그도, 관리팀들의 수직적인 분위기와 업무 처리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다. 협조전을 요청하길래 결재까지 받아넘겼지만, 업무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몇 개월 기다릴 바엔, 당장 하나하나 클릭해서 수기로 기입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는 이런 식의 불필요한 행정 절차와 권한 행사가 의문스러웠다. 그도 이 회사 직원이며, 시스템에 로그인할 수 있다. 사업부장이 지시한 업무이니, 각 팀장들에게 요청하여 입사년도를 취합할 수도 있다. 조회하고자 한다면, 하고자 한다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다. 그런데도 인사팀은, 정리해 놓은 정보를 그냥 내어주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절차를 만들고 시간을 걸리게 하는 것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차피 그에겐 사업부장에게 받은 아이디가 있다. 사업부장 아이디로 로그인하여, 임직원들을 하나하나 클릭하면서 입사년도를 기입한다. 시간만 오래 걸릴 뿐, 여기까지는 출생년도 정보를 기입했던 때와 똑같다. 다만, 입사년도 정보만 가지고는 승진년도를 완벽하게 유추할 수가 없다.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온 '경력직' 때문이다.
1) 이 회사 순혈의 경우
- 대리 진급 : 입사년도 + 4
- 과장 진급 : 대리 승진년도 + 5
- 차장 진급 : 과장 승진년도 + 5
- 부장 진급 : 차장 승진년도 + 5
2) 순혈이 아닌, 경력직일 경우
- 대리 진급 : 입사년도 + ??
- 과장 진급 : 입사년도 + ??
- 차장 진급 : 입사년도 + ??
- 부장 진급 : 입사년도 + ??
경력직의 경우는, 입사했을 당시 경력을 몇 년 인정받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또한 단순 노가다로 시행해야 한다. 그는 경력직 입사자들에게 개인 연락을 돌리기 시작한다.
- 아 네, 안녕하세요 과장님. 혹시 입사하실 때 경력을 얼마나 인정받으셨나요?
- 3년? 4년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근데 뭐 때문에 그러시죠?
- 아, 저희 사업부 차원에서 경력 년도를 조사하라고 하셔서요...
- 네 대리님, 입사하실 때 혹시 대리 몇 년차로 입사하셨나요?
- 음, 2년이었던 거 같은데. 2년일 거에요.
- 아 감사합니다!
- 네 안녕하세요 차장님, 입사하실 때 혹시... ...
경력직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리다 보니, 인사팀의 정보가 필요함을 느낀다. 경력직 직원들 중에서는 인사팀과 협의한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 헷갈리는 인원들도 있었으며, 또한 경력이 년수로 딱 떨어지지 않아 개월 단위인 경우도 있었다. 이 회사의 경우 매년초에 일괄적으로 진급을 시키는데, 몇 개월차까지를 년수로 인정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알 수가 없다. 사업지원팀 입장에서는, 그저 감으로 때려맞출 뿐이다.
S 팀장 : 아마 상반기 입사자들은 진급 대상이 될 거고, 하반기 입사자들은 대상이 안될 거야. 인사팀에 물어봐야 하긴 하는데, 일단은 상반기 입사자들만 진급 대상으로 해봐. 인사팀에서 따로 관리하는 리스트 없대?
그 : 협조전 작성해서 요청하라고 답변받았습니다.
S 팀장 : 협조전은 무슨.. 일단은 내가 얘기한 대로 계산해 봐.
그 : 네 알겠습니다.
S 팀장 : 이게, 승진이라는 게 꽤 민감하거든. 내년도 대상자인 직원들은, 상반기 평가부터 신경을 좀 써줘야 해. 안 그러면 진급 누락이 될 수가 있어. 내가 사업지원팀장하는 동안 아직까지 진급 누락은 한 명도 없었지.
그 : 네. (좋은 건지 뭔지 모르겠다)
S 팀장 : 이 승진년도 시트 같은 경우는 민감하니까, 얼굴이 너랑 나만 볼 수 있게끔 해놔. 알았지?
그 : 네
승진년도 스프레드시트를 만들며, 그도 나름 열정이 발동한다. 진급 누락은 누가 했는지, 빨리 승진한 것은 누구인지를 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회사에서는 매년초, 승진자 및 조직개편 내용을 그룹웨어에 공지한다. 그는 약 20개년치의 공지를 모조리 다운받아, 승진자 명단과 승진년도 데이터를 기입한다. IT사업부 임직원들의 과거 승진 데이터를 모두 모아놓고, 이에 더해 향후 진급 일정까지 계산하는 시트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과거 승진 데이터를 기입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는 다른 이들의 과거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데이터 내에는, 당연하게도, 사업지원팀 상사들의 데이터도 있다.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 그는 상사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건조하고 담백하게 해석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사업지원팀 상사 중 과반수 이상이 진급 누락 이력을 갖고 있다.
그도 귀가 있다 보니, 자꾸만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긴 했다. 사업지원팀 상사들은 거의 대부분 위의 관리팀 출신들이며, 다들 한 가닥씩 했었다. 일할 때는 호랑이 같고, 심지어 관리팀 팀장들과도 마찰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들리는 소문만 갖고 섣부르게 판단하자면, 한창때 꼬장꼬장하고 무섭던 사람들이 사업부에 내려와서 조금은 해탈한 것처럼 유유자적한다는 느낌이랄까.
IT사업지원팀 상사들이 진급누락을 했건 어쨌건, 그에게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가 보기에는 다들 일도 잘하는 것 같고, 그에게도 잘해준다. 상사들에 대한 그의 호감이 흔들릴 여지는 없다. 오히려 정치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멋진 사람들의 모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다.
승진년도 시트 제작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S 팀장은 시트를 한 번 보고는, 사업부장이 볼 수 있도록 공유하도록 하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시트가 그리 정확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혹여나 이를 통해서 어떤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어떻게 하나.
우선은 지시받은 대로, 사업부장에게도 공유한다. 곧이어는 IT사업부 전체 리더들에게 공유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만든 시트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