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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하 Mar 18. 2024

나를 채찍질하고플 때 말려줄 글(2)

독서후사유하기0318-이어령의 마지막수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독서하는 사람의 이미지란 '차분히 앉아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몇 시간이면 책 한 권을 다 읽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웩슬러 지능검사를 했는데 다른 영역보다 '언어이해'가 월등히 높았다. 그걸 보고 의사가 '책은 얼마나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어봤는데 너무 당혹스러웠다. 사실 그때까지 독서라는 것을 거의 안 했기 때문이다. 독서라는 게 너무 멀게 느껴졌다. 사실 책이 너무 싫었다.


 이 정도 높은 언어이해라면 책을 읽는 걸 싫어하기가 힘들 텐데. 나도 내가 이상했다. 훗날 알고 보니 독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가진 '독서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나와는 너무 다르기도 하고, 학생 운동선수였다가 열여덟, 아홉이 되어서야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접한 글이 수능특강, 수능모의평가 문제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글 읽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요즘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원체 완벽주의, 강박이 심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집중이 잘 안 되고 잘 안 읽히는 듯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남들이 재밌다는 책이 나에게 재미있지 않아도 불안해진다.


어제부터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의(이어령, 김지수 저) '마지막 수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나에게 직접 말하시는 듯한 부분이 있어 가져와 본다.



"못 참아, 지루해서. 책도 마찬가지네. 내 책이라고 다르지 않아. 모든 책을 다 의무적으로 서문부터 결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네."
"선생님은 그럼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 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의 형제 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 의무적으로 읽지 않는다 는 말이네.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 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 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 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 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 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예전에 브런치에 '외모 강박'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예쁜 외모가 나를 구원해 줄까 (brunch.co.kr)

이탈리아 역사 상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모니카벨루치도 외모에 집착하지 않고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데 내 얼굴이 뭐라고 그리 집착을 할까 싶어 쓴 글이었다.

 

'마지막수업'의 저 부분을 읽고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손에 집히는 모든 책을 찬찬히 정독하려고 노력했을까. 이어령 선생님도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으신다는데. '제 머리로 읽고 쓰기'를 강조하시는 걸 보니 매일 읽고 내가 한 생각들을 매일 글로 남기겠다고 다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아니라 내가 '한' 생각들을.


요즘 이런 고민(다독해야 한다, 정독해야 한다)을 나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엔 이금희 아나운서가 특이한 독서법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다.

https://youtube.com/shorts/OrBjyUtpgCU?si=XE2OKft0Y1L8Pyzl

15분씩 책 바꿔가며 읽기. 생각만 해도 산만하지만 이금희 아나운서가 전달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이다.


나는 항상 저 '어떻게든'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떻게든'이라는 부사어를 '잘'또는 '훌륭하게'로 바꾸고 싶었다.  아래는 '어떻게든' 과제를 완수한 심채경 박사님의 '관측 썰'이다.


몇 년 만에 기적처럼 딱 하루, 모처럼 날씨가 좋았다. 며칠을 관측자 숙소에서 대기만 하다가 마지막날 밤, 하늘은 말 도 못하게 맑았고 타이탄은 바로 거기 맑은 하늘에 떠 있었 다. 열심히 관측을 하고, 새벽 해뜨기 직전 하늘 플랫까지 한 번 더 찍고 내려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 집에 돌아갈 채 비를 하고 식당에서 들뜬 마음으로 ' 경북 집밥' 점심을 먹고 있는데 천문대의 박사님 한 분이 오셔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 관측, 학위 논문에 들어갈 건가요?"


"네. 왜요?"
"어제, ND 필터가 끼워져 있었어요. 스펙트럼에는 별 영 향이 없지 싶긴 한데, 좀••... 그렇게 되었네요."
어쩐지, 날씨가 그렇게 맑은데 너무 어둡게 찍히더라니.
ND 필터는 관측대상이 너무 밝아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 때 광량 7원을 줄여 어둡게 찍으려고 쓴다. 내가 오기 며칠 전 ND 필터가 쓰였지만 원위치시키지 않은 채 오퍼레이터 가 교대된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내내 날씨가 안 좋아 관측 을 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관측할 때 광량이 왜 그렇게 낮은지 물어봤지만, 필터가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인계받지 못한 내 오퍼레이터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슬프게도 내가 그 천문대에서 그렇게 맑은 날 타이탄을 관측한 건 처음이었다. 나도 경험이 없고 오퍼레 이터도 문제없다고 하니 그저 갸웃거리며 관측을 계속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허락된, 맑은 하늘에 뜬 타이탄의 밤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래도 어떻게 졸업은 했다. 미국과 유럽이 타이탄 코앞까지 보낸 우주탐사선의 관측자료는 아주 깨끗했으니까.

이 글을 읽고 '아, 본인이 관측한 자료를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졸업의 의미나 감동이 바랬다.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졸업은 무사히 하셨구나. 대체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학보사 활동을 했었다. 그 시기엔 코로나가 유행했어서 비대면 녹강을 여러 개 들었어야 했다. 부끄럽지만, 들어야 되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아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결석 처리가 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거에 대한 자책감이 항상 위에 얹힌 듯했고 너무나 창피해 누구에게도 편히 말도 못 했었다. 그러다 학보사 동기가 옆에서 '아 녹강 들을 수 있는 시간 2시간 남았네 이제 틀어야겠다. 저번에 미루다 놓쳐서 결석처리 됐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아, 너도 그렇구나!' 하며 웃음을 빵 터트렸다. 나 말고도 이러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책감이 덜어졌다. (약간의 자책감은 성과에 도움을 주지만 너무 심한 자책감은 오히려 목표달성에 방해가 된다.)


위의 심채경 박사님의 관측썰도 그렇다. 나에게 위로가 된다. 내 눈엔 너무나 뛰어나고 훌륭하신데 (이제 거의 심채경 님 팬이 되었다.) 이 분도 대학원을 훌륭히, 완벽히 졸업한 게 아니라 '그래도 어떻게' 하셨다는 것이다. 본인의 졸업논문을 볼 때마다 '아, 이때 관측자료 내가 직접 관측한 걸로 넣으려 했는데..... 그럴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문이 통과되어 졸업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않겠는가.


문법적으로도 '어떻게든' 같은 부사어는 필수적 성분이 아니다. (가끔 있는 '필수적 부사어'를 제외하고는.)'나는 졸업을 겨우겨우 했다.'에서 필수성분은 '나는'과 '졸업을'과 '했다.'이다. '겨우겨우'는 없어도 완전한 문장이다. 국어시간에 배울 때도 서술어가 가장 중요하며 문장 구조를 결정한다고 배웠다. 그러니 나도 부사어에 집착하기보다는 내 생각을 서술어에 더 포커싱 하고 싶다. '겨우겨우'보다는 '했다.'는 것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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