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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May 10. 2023

그게 결혼이야

중앙떡볶이처럼 솔직한 이야기

'내가 키위 사 오지 말라고 했지? 그 이상한 걸 왜 자꾸 사서 먹으려는 거야?'


<그의 이야기>


와이프는 키위를 먹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취향이 그러한지 지나치게 적대적이다. 그러나 나는 키위가 먹고 싶다. 맛도 맛이지만 키위를 먹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껍질을 까서 먹어도 맛있고, 뚜껑을 여는 것처럼 위에 껍질만 까서 숟가락으로 퍼서 먹는 것도 맛있다(신나리셔스?). 그러나 와이프는 키위를 싫어한다. 그러니 원칙적으로 나는 키위를 살 수 없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처럼 변명하자면, 뱀 같은 마트 사장이 파격적인 세일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맛있게 잘 익은 골드키위를 마치 내다 버리듯이 팔더라. 싸게 사는 거면 그나마 좀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설정한 금기를 넘어섰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왜 그저께 일찍 들어오기로 하고 늦게 들어왔냐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그렇게 또 한 바탕 했다. 아. 오늘은 정말 참지 못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와이프는 정도를 모른다. 항상 끝장을 보려고 한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데. 다 애와 와이프 우리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건데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지엽적인 것들만 트집 잡고 큰 그림을 봐주지 않는다.


부부간의 기본적인 궁금증들.

무슨 생각해?

기분 좀 어때?

우리가 왜 이렇게 됐지?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녀의 이야기>

그는 늘 그런 식이다. 늘 자기 마음대로고 자기한테만 관대하다. 같이 정한 것들도 기가 막히게 자기만을 위한 예외를 만들어서 적용한다.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이후로,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이제는 질문이 바뀌었다. 왜 지 생각만 하고 다른 사람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 '아내와 약속을 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라고 말하면 당장 우리 가족이 거리에 나앉을 것처럼 말한다. 그 두 명제 사이에 있는 수많은 암묵적 가정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하지(황당하지) 않나? 이를 다투면 다투는 대로 난 인정머리 없는 년이고, 설명을 요구하면 꼬치꼬치 따지는 년이고, 논의를 생략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생각 없는 년이지. 남편이 생각하는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덜떨어진 미소 지으며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토닥여주는 방법밖에 없다. 내 무덤 내가 판 인생,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생필품 사러 마트에 갔다가 웬 키위를 사 와다가 거지같이 파먹는 모습을 보고 내 안의 무언가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난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아

그렇지만 자기도 동참해야 해

당신 역할을 하라고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의 이야기>

결혼이란 무엇인가? 결혼은 잔소리와 노코멘트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일단 그녀는 잔소리를 한다. 내가 작은 잘못이라도 할 참이면 쉬지 않고 몰아친다.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몰아친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이 꺼내진다. 다른 한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응원의 말도 칭찬의 말도 격려의 말도 감사의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잘한 일은 잘 해낸 일은 그냥 당연한 일처럼 생각한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당연한 듯 입 벌리고 이내 등 돌리는 그녀를 보면, 내가 뻐꾸기 새끼를 키우는 멍청한 뱁새가 된 기분마저 든다. 아 물론 그녀는 본인 몫을 하는 사람이다. 유치하게 경제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인생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내 인생이란 둥지에 들어앉아서 내가 가진 행복들을 밀쳐 둥지 밖으로 떨어트린다.


닉: 이 망할 나쁜 년

에이미: 당신이 결혼한 나쁜 년이지. 당신은 내가 원하는 남자가 되려고 애썼을 때 그나마 사람다웠어. 난 포기를 몰라. 난 그런 년이야.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녀의 이야기>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또 결혼은 그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주기 싫어지는 것을 뜻한다. 과거에 그는 여자 맘이라고는 일도 모르는 샌님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맘에 들 수 있을지 애쓰며 버벅대는 그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제 그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철저하게 절대 내가 원하는 말도 내가 원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이해해줘야 할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안 해주기 위해서 잘 이해하게 된 거 아닌가 싶다.


닉: 아기를 버릴 순 없어

마고: 양육권 얻어내면 되잖아

닉: 아니 불가능한 거 알잖아. 내 아기야 버릴 수 없잖아.

마고: 같이 살고 싶은 거구나

닉: 책임감 때문이지 원해서가 아냐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의 이야기>

결혼은 국가 주도의 보이스 피싱이다. 국가는 결국 국민이다. 국민 없이 존속할 수 없다. 국가는 결혼을 통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자녀를 낳게 하고 존속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부수적인 효과로 국민들로 하여금 자녀를 부양하기 위한 노동에 뛰어들게 만든다. 이 보이스 피싱은 폰지 사기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하이먼-민스키 이론을 아는가? 열정, 탐욕, 환상을 거쳐 고점에 이르는 사이에 어느새 우린 결혼해 있다. 그러나 이내 인생은 급속도로 하락파를 타기 시작한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현실을 부정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공포에 시달리다가 투매도 고민하지만 바닥을 치고 좌절하고는 존버를 결심한다. 그래, 실패한 내 인생과 내 가족관계는... 고이 남겨서 자녀에게 물려주기로 한다.


우린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왔고 하나가 됐어요.

지금은 대화를 하고 서로에게 솔직하죠. 그렇지? 범죄의 공범이랄까?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녀의 이야기>

부부는 공공연히 인정된 어떤 사기 범죄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고 때로는 공범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희생을 미화하면서 부부라는 폰지 사기 피해자 모임을 존속시킨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내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내 완벽한 인생에 단 하나의 결점이 저기 내 눈앞에 있다. 이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사랑하기로 한다. 사랑으로 해결하려 한다. 실제로 사랑한다.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간혹 사랑이 부족해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내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서 이 관계를 유지해 낼 수 없을 때는, 아깝지만 돈으로 그 시간과 노력을 사서 채워 넣어야 한다. 그게 안 될 때는? 사랑해야지. 더욱.


닉: 당신은 미쳤어 정신병자라고. 왜 이렇게 살려는 거야? 그래, 난 당신을 사랑했었지만 우린 서로를 증오하고 조종하고 상처만 주잖아

에이미: 그게 결혼이야.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중에서


<그의 이야기>

나는 내 와이프를 사랑한다. 나는 내 와이프를 사랑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결혼을 하고 결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다. 사랑은 관심을 쏟는 시간과 노력이다. 사랑은 이해를 해내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다. 사랑은 만족을 주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다. 그래 관심을 가지고 이해해 내서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 이러쿵저러쿵 고민해 봤자 내 선택은 정해져 있다. 우리의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것에 어떠한 이의도 없다. 오늘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함에 이견이 없다. 백기를 들고 투항할 예정이다.


'아저씨, 중앙떡볶이로 가주세요.'


CC였던 시절,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은 중앙떡볶이에 가곤 했다. 잘 만든 떡볶이 국물, 단짠맵이 잘 균형을 이룬 최고의 양념은 대구의 유명한 어느 떡볶이집도 대적할 수 없는 예술의 경지이다. 어디선가 카레향이 올라오는 듯한데 이건 양배추의 힘인지 형언할 수 없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중앙떡볶이는 나의 백기다. 그 색이 붉을지언정 이는 하얗게 펄럭이는 나의 백기다. 예전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살며시 들어올린 납작만두는 그야말로 소리없는 아우성이지.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에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깔깔대며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기억하고 있으려나. 중앙떡볶이는 우리의 시간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자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다. 지난 시간을 생각해 달라는 호소이자, 앞으로도 올 시간도 잘 부탁한다는 요청이다.


'뭐 사 왔어?'

'어... 떡볶이 사 왔어... 미안해서...'

'미안하긴 뭘 또...'

'배고프지? 어서 먹지...'


<그녀의 이야기>

남편이 중앙떡볶이를 사 왔다. 나는 중앙떡볶이의 솔직한 맛이 좋다. 이 쌀떡이 주는 솔직함. 단순한 이 남자의 언행처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얼른 한 입 베어 먹어 씹어 보면, 의심의 여지없는 쌀떡이다. 속이 없다기엔 뭔가 있고 있다기엔 너무 없는 요물 같은 만두피 튀김도 그냥 우리 부부 같다. 이렇게 또 하루를 산다. 그게 결혼이지. 결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 만두피 튀김이니 납작 만두 같은 밀가루 요리들은 식량난을 막기 위한 분식장려 정책의 산물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알고 보면 분식장려정책은 남녀를 연애해서 결혼시키고 또 화해시켜서 국가를 존속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 이래저래 국가에 보이스피싱 당하고 폰지사기 당해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전우처럼 때로는 원수처럼 이러고 사는 우리 모습. 이 떡볶이와 이 만두피 튀김처럼 몹시 행복하다가도 몹시 서글프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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