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셋째 임신 소식을 듣고 카니발을 계약했다. 당시 대기 시간이 길 때여서, 남는 시간에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오딧세이로 마음이 기울었다. 2열 카시트 3개가 가능하고, IIHS 안전성 테스트 성적이 우수하고, 트렁크 크기가 카니발은 비교 대상도 안 될 정도로 광활하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작 혼다 전시장 큐레이터 2명과 과장 모두 내게 3열의 승차감을 제일 먼저 어필했다는 점이다. 아이가 셋이니 당연히 3열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3열 승차감 때문에 오딧세이를 찾는 다자녀 고객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약간 홍보점을 잘못 잡은 듯했다. 왜냐, 내가 보기에, 카니발, 팰리세이드 같은 국산차가 아닌 오딧세이를 보러 오는 다자녀 고객은 '안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차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비 접근성도 떨어지고 수리비도 비싸고 보험료도 비싼 오딧세이라는 "미쿡차"를 보러 오는 것 아닐까? IIHS 결과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국산 미니밴이나 SUV는 패밀리카로 고르기는 무척 어려우니까.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1년을 더 고민해야 했다. 셋째가 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당장 패밀리카가 필요한 게 아니었기도 했지만, 오딧세이 관련한 문제점을 내가 감수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정비를 받으려면 최소 한 시간을 운전해야 제일 가까운 혼다 정비소를 갈 수 있는데, 혼다 정비소에 대한 경험담을 듣자니 스트레스만 엄청 받을 것 같았다. 또한 오딧세이 고질병이 내가 뽑은 차에서 발생하면 정비소를 여러 번 방문해야만 하고,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럼.에.도. 위에서 열거한 장점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고 혼다 홈페이지에서 "계약하기"를 누르기 직전까지 갔다.
혼다 홈페이지를 축소하고 바로 옆에 오딧세이 카페 창을 띄어 마지막으로 내가 못 본 문제가 있는지 검색을 했다. 그러다 1년 동안 수많은 문제를 검색했지만 그 순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알게 되었다. 지상고가 4.5인치 밖에 안 되어서 오래된 건물 주차장 경사로나 규격에 어긋난 방지턱을 넘을 때 중통이 경사로나 턱을 긁는다는 것이었다. 1년 간 다잡은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문제지만 위 (잠재적) 문제를 감수하자고 각오를 다지면서 내 인내심이 다 떨어졌던 것 같다.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가족 여행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급히 다른 차를 알아봤다. 어차피 오딧세이를 포기한 이상, '2열 카시트 3개'는 포기하기로 했다. '3열 상시 사용'이라는 안전성을 많이 타협한 기준에 맞춰, 그 중에서 그나마 안전한 차를 알아봤다. 포드 익스플로러와 쉐보레 트래버스였다. (9천만원 넘는 타호와 그 이상의 체급 차는 예산상 제외.) 포드 익스플로러의 경우 2.3 모델 가격이 1년 몇 개월 사이에 천만 원 넘게 올랐다는 걸 알게 되었던 터라 아웃. 자연스럽게 트래버스가 차선책이 되었다.
다음 날 바로 트래버스를 보러 갔고, 내년 신형 모델 들어오기 전이라 그런지 할인이 들어가 가격도 딱 적당했다. 오딧세이 살 돈에 2백 정도 더 붙이면 최고 트림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혼다코리아가 한국 시장에 딱히 관심이 없는 것처럼, 쉐보레도 딱히 관심이 없다고 느낀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래버스 하이컨트리 트림을 고르려면 선루프를 무조건 넣어야 했다. 선루프 들어간 차량만 우리나라 판매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선루프를 빼려면 트림을 두 단계 낮춰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가격은 오딧세이 보다 싸서 부담이 없고, 또 그 트림과 하이컨트리 트림하고 차이가 발판 명패(?)나 3열 시트 전동 폴딩 기능 같은 부수적인 것이라서 굳이 하이컨트리 트림을 고집할 필요도 없기도 했다. 디자인도 예뻐서 속으로 트래버스로 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순정 사이드스텝이 82만 원이라는 걸 보고 좀 싸했다. 외제차 부품비가 비싸다는 말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트래버스 카페 들어가 보니 트래버스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정비 기사님들도 트래버스를 잘 모른다는 글을 봤다. 당연히 같은 문제로 여러 번 방문하고, 돈은 돈 대로 깨지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무엇보다 내가 사는 지역 정비소에 대한 불만글이 제법 올라와 있었고, 내가 사는 지역 센터에서는 수리를 못 해서 결국 타 지역까지 1시간 넘게 운전해서 정비를 받으러 갔다는 글을 여럿 봤다. 오딧세이 보다 비싼데 오딧세이만큼 정비 용이성과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안전을 포기하는 것. 고작 수리비와 정비 접근성 때문에 내 자식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안전이라는 이상향만 고집하기엔 내가 돈이 많은 백수가 아니었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비 받으러(카페 글 보면, 여러 차례 가야함) 회사를 빠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결국 국산차에서 고르기로 했다. 카니발, 팰리세이드, 모하비 딱 이렇게 3대가 떠올랐다. 모하비는 이미 운용 중이라서 제외했다. 다만 6기통인 모하비 타다가 카니발 디젤이나 팰리 디젤처럼 낮은 파워트레인을 갖춘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니발 계약할 때 가솔린으로 계약했었다. 팰리세이드도 사게 된다면 가솔린으로 사기로 했다.
작년에 계약했던 4세대 카니발은 곧 있을 페리 소식에 재고차가 남아 돌기 시작했고, 딜러한테도 여러 차례 재고차 살 의향이 있는지 연락이 왔던 터라, 카니발로 고르면 즉시 출고할 수도 있었다. 특히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오딧세이 살 돈으로 카니발 사면, 남는 돈이 꽤 되기 때문에 튜닝도 많이 할 수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지 느꼈다. 애초에 안전을 포기하고 카니발과 팰리세이드 중에서 고르기로 했으면서, 카니발은 후면 방향지시등이 범퍼에 달려 있어서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팰리세이드를 사자고 아내한테 제안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다음 날 현대 전시장에 가서 팰리세이드를 봤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내가 멋져 보였다. 아내가 친구 만나러 갈 때 팰리 타고 가는 게 카니발 타고 가는 것보다 더 면이 설 것 같았다. 게다가 비록 팰리세이드가 카니발보다는 비싸지만 켈리그라피 트림을 해도 오딧세이보다 싸서 금액 부담도 없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팰리가 낫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다행히 아내도 OK! 그날 저녁 팰리세이드 카페에 들어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검색했다. 가솔린 모델의 시동 꺼짐이라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검색되었다. 물론 그건 몇 년 전 생산차량의 문제고 지금은 괜찮다는 댓글들. 확증편향을 발동해서 그 문제는 해결된 문제라는 결론을 냈다.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간사한 인간이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뭐 시동 꺼짐 문제를 넘기니 다른 자잘한 문제는 문제로도 안 보였다.
다음 날 선루프 뺀 재고차량 찾아서 계약하고, 잔금 일시불로 지급하고, 딱 1주일 후 신차패키지까지 끝낸 팰리세이드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패밀리카 출고기는 (허망하게?) 딱 하루 알아본 팰리세이드를 출고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