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Oct 03. 2023

할머니와 옥수수

아이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삶았다. 성질이 급한 나는 옥수수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후후 불어서 옥수수 알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마음처럼 잘 뜯어지지 않고 옥수수 알갱이가 너덜너덜 분리되었다. 아이 입에 쏙 넣어주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아기였을 때, 엄마의 할머니가 옥수수를 이렇게 뜯어서 주셨었거든. 근데 그때 할머니가 주셨던 옥수수 알갱이들은 이것보다 정갈했단 말이야. 근데 엄마는 잘 안 되네."

집 근처 텃밭에 옥수수를 기르던 우리 할머니는 옥수수를 추수하고 나면 큰 솥에 옥수수를 삶으시곤 했다. 아주 적당한 온도의 옥수수를 한 손에 쥐고, 능숙하게 옥수수 알갱이를 분리하셨더랬다. 두툼한 손으로 툭툭 옥수수를 어루만지면, 한 줄의 옥수수 알들이 도로록, 한꺼번에 분리되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찰싹 붙어서는, 할머니가 옥수수 알을 떼어낼 때마다 할머니 손에서 바로 훔쳐 입으로 넣곤 했다. 갓 쪄낸 부드러운 옥수수 알을 한 입 가득 물었을 때의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아이에게 옥수수를 삶아주려니 옥수수는 너무 익어서 알알이 터져버렸고, 참지 못해 옥수수를 꺼내면 너무 뜨거워서 만지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식을 때까지 기다리니 너무 식어버려서 딱딱해져 버렸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게 딱 적절한 온도의, 터지지도 않고 설익지도 않은 적당히 부드러운 옥수수를 제공해 주었다.


지난달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할머니 추도식을 지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되던 날이었다. 막내 고모의 노력으로 할머니는 성도가 되어 장례를 치렀고, 추도식 역시 제사가 아닌 추도예배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막내 고모부는 1년 동안 할머니의 추도예배를 준비했다. 아빠도, 나도, 다른 고모부들도 기독교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추도식의 방식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엄마 따라 교회를 다녔음에도 기독교를 대단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그 어떤 예배보다 경건했고, 감동적이었고, 즐거웠다.


고모부는 각자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첫 타자는 손녀 중 가장 이쁨을 많이 받았던 나였다. 왜 사전 협의도 없이 나부터 시키냐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할머니에 대한 내 추억을 이야기하자니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이제는 마음이 많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차오르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저의 모든 것은 할머니가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문장이었다. 나의 주 양육자였던 할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나의 얼굴, 자세, 습관, 말투, 표정, 성격 모든 것이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학창 시절 내 별명은 '할미'였다. 말투든 자세든 생각하는 것이든, 모든 게 할머니 같다며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나는 그 별명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 할머니 따라 시장에 가면 할머니랑 손녀가 똑 닮았다는 말을 한 번 이상은 꼭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참 좋았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나 바꿔달라고 하면 할머니는 '잔다' 한 마디하고 전화를 끊곤 했어요. 그럼 친구들이 다음날 만나서 '너네 할아버지 무섭더라'라고 말했어요. 나는 할머니의 곧은 허리와 굵은 뼈, 큰 발. 맨 손으로 바퀴벌레도 턱턱 잡는 두툼한 손이 참 좋았어요."

나에겐 언제나 용감하고 대범하며 자신감 넘치는 할머니였지만, 고모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큰 고모는 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시장에 가면 자기 뒤에 숨어서 이렇게 말해라, 저렇게 해봐라 주문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든든한 큰 딸과 함께 있을 땐 한없이 기대고 마는 그런 엄마였다고. 사실은 수줍음 많고 소심하기도 했던 할머니였지만, 손녀 앞에서는 항상 대범했다. 덕분에 나는 한 번도 할머니가 약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언제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할머니였어요. (남편미안) 어릴 때부터 항상, 할머니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고.."

따라 죽겠다던 손녀는 할머니의 죽음 1년 후에도 멀쩡히 살아있다. 돌아가신 직후 일주일은 '더 이상 살아 뭐 하나' 사춘기 소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나에겐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의 얼굴, 자세, 습관, 말투, 표정, 성격 모든 것을 똑 빼닮은 딸. 내가 뜨거운 옥수수를 후후 불고 한 알 한 알 떼어 입에 쏙 넣어줘야 하는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을 해봐도 할머니처럼 옥수수 알갱이를 도로록 떼어내진 못하지만.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내 얼굴과 말투,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 작은 인간에게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모두 전할 때까지 나는 살아야 한다.


유독 가을, 겨울에는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가을의 입구이기도 하지만, 할머니와 나눠먹던 음식들이 대부분 가을, 겨울에 먹는 따뜻한 음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도로록 알갱이 떼어주던 옥수수, 숟가락으로 푹푹 퍼내주던 삶은 밤, 가위로 슥슥 갈라 살을 쏙 빼주던 홍게, 시장에서 버스 타기 전 매번 사주셨던 붕어빵,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뜨끈하게 먹던 야채호빵. 두툼한 할머니의 손으로 건네주던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었다. 내가 아이에게 전해주는 무수한 사랑을 남겼다. 엄마는 언제나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하는, 굳센 마음도.

이렇게 옥수수를 삶는 계절이 되면 나는 항상 할머니를 떠올릴 테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된 후 첫 여행을 다녀오며, 내 딸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