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이 지나서 문과, 이과, 예체능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무엇이 좋을지 몰라 다시금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재미있는 과목이 아니라 성적이 잘 나오던 과목을 따라 선택해야 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공식 같은 것이 존재했다.
국어와 영어를 싫어하면 이과를 가고, 수학과 과학을 싫어하면 문과를 간다. (예체능은 타고나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과목을 피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청난 함정이 있었다. 이과를 가도 영어는 중요했고, 문과를 가도 수학은 중요했다.
문과
일단 확실하게 문과는 내 체질이 아니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국어, 영어 성적이 좋지 않았다. 틀린 문제의 정답지를 봐도 해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어는 '나의 답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의아함이 든 오답이 많았다. 영어는 전치사 빈칸 문제가 특히 어려웠는데, 어떠한 전치사를 넣어도 그대로 해석이 될 것 같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정답률이 떨어지는 건 이쪽에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언어는 역시 타고나는 것인가.
내 주변의 친한 친구들은 이과를 선택해서 문과 친구들의 진로는 잘 몰랐다. 하지만 대학생 때 대외활동을 통해 만난 친구들은 문과생이 많았다. 이들은 금융, 제약, 전자 등의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작가, 방송, 프리랜서 등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자리 수가 이과 쪽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이 분야의 친구들은 스펙이 엄청이나 높았고, 그만큼 연봉이 높고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지인들은 짧은 정년을 걱정했다. 그러나 워낙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고급 정보를 잘 수집해서 재테크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이 친구들은 언변이 청산유수이고, 프레젠테이션을 구성하고 발표하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외국 생활을 한 케이스도 많아서 내가 못하는 영어를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나는 이과를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멋진 모습을 갖고 싶어서 문과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일이 본업이 될 수도 있는데, 이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기에 진로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과
모의고사를 보면 수학, 과학 성적이 그나마 가장 좋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과를 선택했다. 과목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성인데 이 시기에는 사람이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예컨대 좋아하는 선생님의 과목을 따라가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수학 선생님은 젠틀하고 똑똑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다. 최근까지 EBS 강사로 나오실 정도였다. 선생님께서는 수업 시작 전, 5~10분 정도의 퀴즈를 내면서 학생들의 흥미를 북돋아 잠을 깨우고 집중하게 만드셨다. 그 시간이 전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수학보다는 수학 선생님이 좋아서 이과가 더 끌렸다.
이과를 택한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직업을 가졌다. 나처럼 전기전자, 자동차, 화학 등 대기업에서 엔지니어, 연구원이 되거나, 전문직으로 의사, 약사, 회계사가 된 친구도 있고, 공무원이나 직업군인이 된 친구도 있고, 최근에는 자영업, 투자회사를 창업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직장인이 대다수이다. 근무지는 대부분 지방 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연구소나 생산 공장은 주로 수도권에 설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로 문과생보다는 정년이 길거라는 믿음이 있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변해가는 추세라 다들 생각이 많다.
이과 친구들은 나처럼 단순히 수학과 과학 중에서 특정 한 과목이 좋아서 진로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학과 과학은 연결되어 있어서 둘 다 잘하지 못하면 성적 향상에 걸림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덤으로 영어는 기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노출빈도가 문과보다는 적다는 점이다. 주로 경영이나 기획보다는 직접 실험하거나 생산하는 노동이 주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의외로 인내심을 요하는 직무가 많으니 반복된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이과 진로선택에 신중했으면 한다.
예체능과
고3 때, 우리 반은 체대 진학을 하는 5명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들은 매일 체대 입시 학원을 다니면서 실기연습을 하고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쉬는 시간에 얘기를 들어보면, 토할 정도로 운동을 한다고 했다. 어렸을 적 운동을 포기했던 그 선택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 친구들은 체격, 체력,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사교성이 남다르다. 사람 관계를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긴 하지만 그만큼 서로 이끌어주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예체능과를 선택한 나의 친구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현재는 대한체육회, 직업군인, 교사,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는 날씬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몸집이 많이 커졌다. 아마도 기초대사량이 줄어드는데 섭취량은 그대로다 보니 그렇지 않을까.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보력이 뛰어난 장점이 있는 만큼 잦은 회식으로 과식을 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이 계열의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재미있게 사는경우가 많았다.
예체능과 임에도 우리 반 친구들은 공부를 다 열심히 했다. 운동부와는 다른 개념 같았다. 5명 전원이 수도권 학교에 진학한 것 보면 대단한 것 같다. 어쨌든 예체능 진학을 꿈꾸는 친구들은 타고난 피지컬과 기본 지식을 꾸준히 함양하면 좋을 듯하다. 단, 엄격한 선후배 문화와 사교성을 활용하는 것이 힘들면 진로를 다시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선택과 결과
'핵과 전자의 개수를 조절할 수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창조할 수 있다.'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이후에 화학 선생님이 해주신 이 한 줄의 명언에 감동하여 화학 전공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과학 중에서 내게 가장 잘 맞는 과목이라 지금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화학 전공은 화학공학으로 진학하여 공학사가 될 수 있고, 순수 화학으로 진학하여 이학사가 될 수 있다. 취업은 공학사 훨씬 유리하지만, 석사 이상을 취득하면 이학사도 연구개발 업무 분야 쪽으로 취업 시 불리함이 없어진다.
나의 경우, 입학 당시 화학 및 신소재과학과 전공이었지만 군 전역 후 복학을 했더니 응용화학과로 전공이 변경되었다. 공대에서 모든 수업을 들었는데 갑자기 자연과학대로 바뀌었다. 사인을 안 하면 졸업이 안된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공대에서 공부한 자연과학대생이 되었다.
생산 관리 분야에서 취업을 꿈꾼다면 화학공학 학사 수준이면 지원 가능하며, 연구개발 분야에서 취업을 꿈꾼다면 화학공학, 화학 석사 수준이면 지원 가능하다. 생산 관리는 지방 오지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높고, 연구개발은 지방 대도시 쪽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경우에는 수도권 연구소에 발령이 나서 10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다시 공대 대학원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