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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Dec 14. 2022

이름 없음

영화 <어느 독재자> 속 이름에 대하여.

이름 없음     

에디터 토디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영화 <어느 독재자>를 보았다면 혹시 기억나는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지 묻고 싶다. 필자에게 있어 기억나는 이름이라고는 독재자의 손자가 애타게 불렀던 ‘마리아’ 정도뿐이다. 당신이 영화를 주의 깊게 봤다면 독재자가 손자에게 딱 한 번 불렀던 이름(진짜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정도가 생각났을 것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에서, 독재자의 이름은 없다.     


  영화 <어느 독재자>에서, 독재자는 등장하자마자 테러범들의 명단을 넘겨 가며 서명을 한다. 서명은 그의 이름을 유추할 수 없을 만큼 흘려 쓰인다. 하지만 테러범들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선명하게 화면에 담긴다. 스쳐가는 모든 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정작 주인공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도일까. 영화 <어느 독재자>의 이름 없는 어느 독재자를 통해 서사에서의 ‘이름 없음’의 몇 가지 기능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어느 독재자>는 실존하는 특정 국가가 아닌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류가 수없이 겪어 왔고, 또 겪고 있는 것들이다. 독재자에게, 그리고 어떤 국가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나 국가를 떠올리지 못하게 함으로써-혹은 다양한 것을 자유롭게 떠올리게 함으로써-정치·사회적인 블라인드의 기능을 한다. 이것은 ‘이름 없음’의 가장 단순한 일차적인 기능에 속한다.

  둘째로, 이 ‘이름 없음’은 영화에서 특정 개인이 아닌 어느 ‘독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가 중요할 때에 이름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것은 효과적일 수 있다.

  ‘이름 없음’의 세 번째 기능은 서사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 없음’을 ‘이름 모름’의 빈칸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될 수 있음’의 빈칸으로 남겨두는 것이다.(이 영화에서 ‘이름 없음’이 세 번째 기능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비어 있는 이름의 칸에는 나도, 당신도, 우리도, 혹은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도 들어갈 수 있다. 때문이 ‘이름 없음’은 때로는 이야기가 가지는 보편성과 가능성의 토대를 넓혀 준다.1)     


  이러한 ‘이름 없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아들을 두고 탈북한 한 여성의 삶을 담아낸 영화 <뷰티풀 데이즈>의 경우에, 화자인 주인공의 아들(젠첸)의 이름은 존재하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불러야 하는 상황에도 ‘엄마’, ‘당신’, ‘야’ 등의 호칭어를 사용하는 것은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의 ‘이름 없음’은 앞서 언급한 세 번째 기능인 보편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너무나도 보편적인 이러한 이야기에서, ‘이름 없음’은 그 역할을 탁월하게 해낸다.2)   

  

  한편 뮤지컬 <미드나잇:액터뮤지션>과 <미드나잇:앤틀러스>3)에도 이름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각각 맨, 우먼, 비지터라는 배역명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 비지터가 맨에게 “여기 적힌 것이 당신의 이름이 아니냐”고 묻는 장면을 통해 이들의 이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의도적으로 감추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의 ‘이름 없음’은 앞서 설명한 두 번째 기능과 세 번째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 맨과 우먼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저지르는 일들만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한다.

  한편 그들의 ‘이름 없음’이 만들어낸 빈칸에는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그 빈칸에 스스로 들어가고, “어떡할래? 그럴 때 너라면” 이라며 서로를 집어넣고, 동시대에 “수백만의 집에” 존재하던 모든 이들을 집어넣는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 빈칸 안에 자신을 집어넣고, 스스로에게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것이 이 작품에 존재하는 ‘이름 없음’의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까지 작품 속에서 ‘이름 없음’의 기능에 대해 논하면서 그 ‘이름 없음’의 서사를 어떻게 읽어낼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창작자가 당신을 위해 비워 놓은 칸에 무언가를-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 스스로라면 더욱이-기꺼이 던져 보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1) 소설 등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1인칭 화자를 ‘unnamed narrator’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이름 없음’이 1인칭으로 나타날 때에는 독자와의 거리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2) 영화 <뷰티풀 데이즈>에서의 ‘이름 없음’은 아트렉처의 아티클 「<뷰티풀 데이즈>의 주인공은 왜 이름이 없을까 -탈북-여성-엄마의 영화적 재현 속 이름없음에 대해-」,송혜림,2021.(  https://artlecture.com/article/2095)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3) 같은 플롯을 다른 방법으로 연출한 작품들로, 등장인물과 줄거리는 동일하다. 이 작품 역시 <어느 독재자>처럼 독재국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여기서의 ‘이름 없음’이 첫 번째 기능(블라인드)을 하고 있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이 작품에는 소련의 비밀경찰이었던 ‘엔카베데’라는 조직명이 대놓고 등장한다. 심지어 <미드나잇:액터뮤지션>의 무대에는 스탈린의 초상화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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