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학년 교사의 시간, 일교시
점심시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반 아이들 대여섯 명이 나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하민이 울어요!!"
"무슨 일이지요?"
"모르겠어요!!"
아이들의 상기된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사건의 크기를 짐작하고 다 먹지 못한 식판을 급히 정리했다. 분주히 발걸음 한 끝에 하민이 앞에 도달하였을 때, 하민이는 한 뼘정도 더 큰 3학년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울음으로 인해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는 하민이의 외계어를 잠시 듣다가 안 되겠다 싶어 똑단발을 한 여자아이에게 물어봤다.
"무슨 일인가요?"
"아니, 선생님 저희 반에 원철이란 남자애가 있거든요? 걔가 원래 욱하는 성질이 있어요. 평소에도 아주... 아무튼 그런데 여기가 1학년이 노는 곳이 아닌데, 하민이가 놀고 있으니까 비키라고 성질을 내는 거예요. 1학년인데 잘 모를 수도 있잖아요."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타인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녹아내려있는 멋진 설명이었다. '3학년 선생님으로 1년을 지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하민아, 언니 설명이 맞나요?"
"흐흑, 내가 놀고 있었는데 흐흑, 오빠가 갑자기 흑흑, 나한테 엄청 화냈어요오오오흐흐흐윽."
하민이는 채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민이 입장에서는 본동과 후동 사이 보도블록의 경계에서 어디가 1학년이 노는 곳이고 어디가 3학년이 노는 곳인지 구분이 되기 어려웠으리라.
"원철이란 친구는 어딨나요?"
"걔 화내다가 물건 발로 차면서 운동장으로 달려갔어요."
"선생님 여기 있을 테니 원철이 좀 불러 줄 수 있나요?"
"네~"
하민이 주변에 있던 여자아이 둘셋이 재빠르게 달려갔다. 빠르게 사라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은 두려웠다. '평소 욱하는 아이라고 하는데 어쩌지...''통제가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민이의 울음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걔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을텐데...' 등등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을 때 멀리서 씩씩거리는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은 아직 상기가 되어있었다.
"네가 원철이니?"
"네."
"안녕, 선생님은 하민이 담임 선생님이야. 네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우선 난 네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무슨 일이니?"
아이는 씩씩거리긴 했지만 하민이와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억울함이 가득했다. 자신은 규칙을 잘 지켰으니 그렇게 느낄만도 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지만 1학년 동생이라 노는 곳을 잘 모를 수 있다. 동생에게는 친절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설명하자 원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하민이었다. 하민이 입장에서는 이해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오빠가 나한테 계속 화냈잖아아아!!"
내가 "하민아."하고 단호하게 제지하자 원철이는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민이가 사과를 했으면 쉽게 끝났을 텐데, 하민이가 원철이의 화를 돋우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욱하는 성질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원철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상냥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한껏 차오르던 화를 제 딴에는 삭이려고 노력한 모습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나는 가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열댓 걸음을 간 뒤 "아오!!! 진짜!!!"라고 남아있던 짜증을 분출했다.
"선생님, 쟤가 원래 좀 저래요."
3학년 여자아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얼핏 핀잔 같아 보였지만, 나에게 이해를 구하는 말이었다. 나는 알겠다는 듯 말없이 미소 지었다. 잠시 뒤 3학년 여자아이들 중 하나가 메고 있던 하늘색 크로스백에서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하민이에게 건넸다. 눈물로 얼룩졌던 하민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번졌다.
"선생님, 사탕 먹어도 돼요?"
"안돼요~ 언니한테 고맙다고 하고, 먹는 건 학교 다 끝나고 먹으세요."
"네~"
하민이는 한쪽 옷소매에 사탕을 쏙 넣더니 옷소매를 꽉 쥔채 달랑거리며 교실을 향했다. 하민이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니 사탕에서 꼭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건 다 열 살의 품격 덕분이었다. 3학년 여자 아이들의 위로의 기술도 멋졌고, 원철이의 사과도 멋졌다. 하민이도 더 자라면 이렇게 멋진 어린이가 될 수 있겠지? 잠시 동안이지만 원철이에게 편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 편의점에 들러 콜라맛과 레인보우 멘토스 두 줄을 샀다. 그리고 원철이네 반으로 향했다. 담임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원철이를 따로 불렀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온 원철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안녕? 어제는 선생님이 정말 고마웠어.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동생이라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잘 마무리돼서 이건 선생님이 주는 선물이야. "
원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교실로 들어서는 원철이의 발걸음도,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아마 오늘도 학교 곳곳에서는 내가 미처 보지못한 저마다의 품격이 가득 피어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