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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Mar 31. 2023

행성

그냥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다. 화성이 조금만 더 태양 가까이로 다가가 지구와 위치를 나란히 한다면 화성에도 생명체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며 지구와 화성의 공전 궤도가 겹치는 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냥 비과학적으로 화성이 태양 쪽으로 차츰차츰 발을 옮기는 상상을 해봤다. 아쉽지만 화성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계를 이루는 모든 행성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이 혹시 살아있지는 않을까하는 상상을 종종 한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정의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영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살아있다면? 지금 내 앞에 놓인 의자가 사실 인간이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거나,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파장의 빛으로 서로 소통하고 있다면? 삼류 SF소설에도 안 나올 것 같은 상상이지만, 어쨌든 난 모든 무생물들이 혹시 인간의 사고로는 닿을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냥 내가 원래 생각을 이런 식으로 한다. 개조심 표지판을 보고 개 입장에서는 '사람조심'이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대입을 잘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고 지나친 역지사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다 못해 사물과 입장을 바꾸는 사람이라니.


지구는 축복받은 행성이다. 태양과의 거리가 적당하고 기타 여러 조건도 알맞아서 생명체가 살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지구가 아파요!' 따위의 말이 나올 만큼 인간들이 지구를 조금씩 망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 정도로 몸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푸른 하늘과 푸른 식물이 만드는 아름다운 자연을 여전히 감상할 수 있고,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봄나들이를 떠날 수 있다. 우주에서 보는 푸르른 행성의 모습은 투박한 여타 태양계 행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지구가 아름다운 행성이라는 입장은 지구에 빌붙어 사는 인간들에게나 납득 가능할 것이다. 전혀 지구에 애정이 없는 외계인이 지구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저 침략하기에 매력적인 외계 행성 중 하나 정도로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화성이나 목성 같은 다른 태양계 행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마 지구는 부모의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는 막내아들 같은 질투의 대상으로 느껴질 것이다. 운 좋게 위치선정을 잘한 것뿐인데 저렇게 잘 먹고 잘 살다니. 자신의 투박한 모습과 척박한 환경을 지구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태양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져서, 지구와 같이 적당한 온도에 도달해 생명력을 지니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성의 궤도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우주의 섭리가 행성의 미래를 이미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지구보다도 더 크고 아름답게, 가장 뜨겁고 찬연하게 빛나는 태양 주위를 한없이 맴돌아야 하는 운명.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할 수 없어 그저 어지러운 회전 운동만 반복해야 하는 운명. 언제까지? 별의 수명이 다하거나 은하가 뒤틀리는 순간까지.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아득한 미래를 기다리거나 심지어 불가능을 고대해야 한다.


불가능을 염원하는 일이라니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을 염원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긴 고생 끝엔 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일출과 노을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해와 눈을 맞추는 순간 느낄 수 있는 묘한 심장박동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영원한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반영구적 행복을 갈망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이 곧 불가능을 염원하는 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우리는 행성과 같아서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 궤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앎에도 매일 밤 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며 뒤척인다. 일종의 몸부림이랄까, 뭐라도 해보고 싶다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겠다는 멍청한 비효율이지만.


빛처럼 살 수 있을까? 별이 될 수 있을까? 행성을 거느리는 항성으로 살 수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할 것 같다. 화성 같은 나는 오늘도 내 앞에서 도는 지구를 바라보며 약간 우울해진다. 지구에는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지만, 화성에는 물이 흘렀던 흔적뿐이다. 춥고 메마른 행성은 어김없이 같은 길을 간다. 차라리 태양에 뛰어들어 모조리 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변하지 않는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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