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May 13. 2023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3월 말쯤이었던 것 같다. 혹독할 만큼 세차게 부는 칼바람이 서서히 순순해지는 3월과 4월의 사이였다. 그러나 가시지 않는 이따금의 꽃샘추위는 새벽 즈음의 온도를 뚝 낮췄다. 어느 날은 밤에 잠을 자는데 이상하게 너무 추워서 이불로 몸을 칭칭 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기가 느껴져 몸을 이리저리 웅크리다 잠을 설쳤는데, 알고 보니 닫았다 생각했던 창문이 내내 열려있었다. 블라인드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다. 3월의 밤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꽤나 추웠다.


요즘은 밤에 창문을 열고 자도 춥지 않다. 계절의 특색은 우리의 일상적 루틴을 비롯해 우리의 마음가짐까지 꽤 바꾸어놓는다. 이불의 포근한 온기는 계절을 지나 같은 온도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열기가 되었다. 겨울에는 약간의 온기를 소중하게 붙들며 잠을 청했다면 여름이 되면서 그 약간의 온기는 내게 무척이나 성가신 것으로 여겨졌다. 이불을 손에 꼭 쥐던 나는 이제 이불을 걷어찬다. 계절은 우리의 일상적 루틴을 비롯해 우리의 마음가짐까지, 꽤 많이, 바꾸어놓는다.


어쩌면 당연하고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이불을 꼭 덮고 여름에는 더우니까 이불을 걷어차고 말이다. 계절에 따른 온도의 변화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 마냥 추우면 옷을 껴입고, 더우면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비가 오면 한 손에 우산을 챙기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는 마스크를 하고. 아주 당연하고도 당연한 삶의 양식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곁 어딘가에서 숨 쉬는 작은 사람들은 이 당연한 삶의 양식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비가 오지만 우산을 쓸 수 없는 사람들. 내리는 비를 막을 힘이 없어 구멍난 마음으로 받아내는 사람들. 조금만 눈을 들어 찬찬히 돌아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작고 작은 사람들의 존재를.


언젠가 시간이 나서 방바닥을 빗자루로 한 번 쓴 적이 있다. 평소에 약간 유별난 깔끔을 떠는 편이라 책상에 조금이라도 뭐가 묻으면 참지 못하고 빡빡 닦아내곤 하는데, 방에서는 안경을 벗고 생활하다 보니 바닥이 깔끔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빗자루로 몇 번 쓸었더니 각양각색의 먼지와 머리카락들이 수북이 모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창틀에는 꽃가루가 덕지덕지 쌓여있었다. 항상 방이 깨끗하다고 확신하면서 살았는데 원효대사 해골물이었다.


난 아침에 외출할 때는 안경을 벗고 나간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아침부터 눈에 각종 정보들이 입력되면 미리 피곤해져서 싫다. 안경을 벗고 나가면 눈에 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분주한 바깥세상이 아닌 나의 잔잔한 내면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가끔은 친구들이 인사해도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칠 때가 있다. 봐야 하는 것을 못 보는 것이다. 더러운 바닥을 보지 못하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하며 살아왔을까? 시력 나쁜 우리는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흐지부지 놓치며 산다. 아침마다 당연하게 걷는 길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당연하지 않은 땀이 투영되어 있다. 당연한 것처럼 길 가장자리에 쌓인 낙엽 더미에는 누군가의 당연하지 않은 시간이 깃들어 있다. 당연한 것처럼 현관문 앞에 놓인 상자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녹아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마음이 망가져도 묵묵히 아침 일찍 몸을 일으켜야 하는 사람들을 본다. 땀이 뻘뻘 흘러도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든 사람들을 본다. 등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쑤셔도 품에 무게를 안고 걷는 사람들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위로를 읊조릴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한 번의 기회에 눈과 꿈과 힘과 삶을 쏟아부어야하는 사람들을 본다. 날씨가 좋아 기분이 들뜨는 날에는 이따금 멈춰 서서 상상한다. 날씨가 좋고 나쁨 따위는 전혀 신경 쓸 겨를 없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하늘이 얼마나 파랗고 아름다운지 따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 막막함을 가슴 한편에 안은 채 그냥 사는 사람들. 삶의 무게를 어느 것으로도 덜어내지 못해 보이지 않는 여정을 선택한 사람들.


춥지만 이불을 덮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볕이 뜨겁지만 태양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노고는 누군가의 편의로, 누군가의 고독은 누군가의 사랑으로, 누군가의 어지럼은 누군가의 환희로, 누군가의 가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성취는 누군가의 용인으로, 누군가의 이유는 누군가의 울분으로, 누군가의 빛깔은 누군가의 흑백으로, 누군가의 자유는 누군가의 항거로, 누군가의 동화는 누군가의 자처로. 애당초 당연한 것은 없다. 애당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얽히고설킨 시간과 깨달음과 눈물과 수긍이 있다. 누군가의 당연함은 누군가의 가당찮은 꿈.


작가의 이전글 명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