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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Aug 28. 2023

고요가 길고 안착은 멀어서

미동도 없이 침대 옆 같은 자리에 인형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꽤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들은 잊히기 쉽다. 계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석진 어딘가에 포개져 있을 한 벌의 옷이나 화이트톤 벽에 다정하게 걸린 나의 어린 시절 사진 같은 것.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지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잊힌다고 서운해할 심장이 없거나, 심장이 이끄는 목적지가 없다. 삶이 그 자리에 못 박힌 순간 과거나 미래 따위의 시간 개념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같은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날짜나 요일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그렇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는 사람들은 달력 칸 하나씩을 배정받은 숫자의 색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 숫자가 독방을 쓰는지, 같거나 다른 숫자와 동거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짤막한 직감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거나 기껏해야 날씨 정도를 신경 쓴다. 오늘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같은 자리에 가고, 창밖이 어둑해졌다 싶을 즈음 오늘도 삶의 단위 하나가 나를 스쳤음을 안다. 나라가 정한 공휴일이나 과거로부터 파생된 기념일, 또는 날아드는 예상치 못한 소식처럼 긴 반복의 고요를 깨는 객을 맞닥뜨려야 그제서 시간 개념을 복습한다.


최근에 부모님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도시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어 인기척이 덜했지만 서로 부대끼는 잎과 꽃 덕에 홀로 걸어도 외로울 것 같지 않은 가로수길에 자리한 식당이었다. 노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고, 그렇다고 여타 식당과 동일시하기에는 가정집 같이 약간 어질러진 분위기였다. 업소용 캔사이다와 병맥주 상자가 상온에서 미지근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낙지볶음 3인분을 주문하자, 옆 테이블에 땀에 푹 젖은 작업복을 입고 모여 앉은 중년 남성 여러 명도 낙지볶음을 시켰다.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은 외양, 스타일이라고 부르기에 헷갈려지는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평소 식사 중에 대화는커녕 잘 쳐다보지도 않는 우리 가족이 가장 시끄럽게 밥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아저씨들은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식당은 고요했다. 마치 안방에서 낮잠을 자다 오후 한창때 목을 축이러 거실로 나왔을 때 느낄 수 있는 묘하고 멍하고 피곤한 고요.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공깃밥 그릇의 밑바닥을 긁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졌다. 많은 꿈과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을 긴 고요를 어색해하지 않고 조금은 즐기면서 식사를 마쳤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꽤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아빠가 입을 떼셨다. 아빠가 며칠 전 큰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운전을 하는 중에 어쩌다 좁고 낯선 길에 들어섰는데 알고 보니 막다른 길이었다. 차를 돌릴까 고민하다 일단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길래 병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는데, 막다른 길 옆에 작게 난 샛길을 가리키며 쭉 올라가기만 하면 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차가 들어가니 거의 틈도 없게 딱 맞는 길을 운전하는데, 길이 너무 험한 데다 양옆은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심이 될 만큼 낡고 허름한 집이 많아서 무서울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분명히 사람이 살기는 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감히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다고 한다.


길이 심하게 거칠고 꺾인 탓에 이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길이 자신의 인생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분명 큰 대로를 달리며 평탄하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험하고 두려운 길을 운전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길 끝에는 병원이 있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참고 지나면 목적지가 보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나긴 고요에 휩싸인 샛길을 지나 병원에 안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상황도 믿고 지나간다고.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믿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셨다.


가만히 있는 것들은 잊히기 쉽다. 그럼에도 가만히 지내는 것들은, 잊힌다고 서운해할 심장이 없거나, 심장이 이끄는 목적지가 없어서 가만히 지내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어서. 목적지가 없어서. 안착해 거주할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오래 조용해진다.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수가 해를 넘길수록 늘어나는 세상을 살며 목적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단순한 생존과 필요의 의미를 둔 시간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며 몰래 울고 떼를 쓰는, 아무도 없는 방에 누운 채 액자에 너무도 깊게 새겨져 움직일 수 없는 어린 나와 아픈 동질감을 느끼며 긴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많은 아무개를 떠올린다. 아무도 이 길 끝에 어떤 목적지가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분명히 사람이 살기는 하는데 사람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세상을 살면서, 고요의 길을 두려움으로 운행하고 있을 운전자들. 주제넘게 이름모를 타인의 삶을 깊이 고민하다 마지막에는 나를 대입해 본다.


무엇을 위해 사냐고 묻는다면 답할 가식은 많지만 믿는 구석을 갖고 확언할 대답은 없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못해서, 명확하대도 그 길이 너무 험해서, 의심하고, 격분하고, 체념하고, 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조용히 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소극적이라고 비난하기에 선택지는 없다. 낙지볶음을 말도 없이 먹던 아저씨들의 점심시간도 비슷하겠고 그 옆에서 잔잔하게 그릇을 비우던 우리 가족의 점심시간도 비슷하겠다. 모든 사람들의 침묵이 그러하겠다. 막연히 불안해서, 어쩌다 기뻐지면 어느 순간 싸해져서, 잘 몰라서 조용히 있는 것이다. 고요가 가장 확실해서 오래 고요해지는 것이다. 목적지가 불분명하다. 고요가 길고 안착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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