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이 따뜻함으로 순순해지는, 그러나 볕 끝은 여전히 가늘게 날이 서 있는 초가을의 아침이었다. 그날은 유독 짐이 많았다. 오늘 안에 마무리해야 할 문서 탓에 노트북을 챙겨야 했고, 화학 실험 수업을 위한 실험복과 보안경에도 모자라, 교양 수업 교재인 민법총칙까지. 게다가 아이패드와 충전기, 물병 같은 것들까지 주섬주섬 챙기다 보니 가방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메기만 해도 키가 작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가방을 어깨에 얹고 문을 나서려는데,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은 이미 만원이었다. 별생각 없이 책 두 권을 한 손에 들었다.
기숙사와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 사이는 꽤 애매하게 거리가 있어서, 등하교할 때는 주로 공유 킥보드를 타고 이동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기숙사 건물 앞에 일렬로 주차된 킥보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별생각 없이 한 손으로 킥보드 손잡이를 잡으려다 깨달았다. 다른 손이 쥐고 있는 푸른빛 책 두 권을.
묵직한 가방의 무게와 따가운 볕의 혹독함을 동시에 느끼며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은 두고 올걸, 후회하는 와중에 웬 하얀 트럭 한 대가 다가와 옆에 멈췄다.
ㄴ 학생, 탈 거면 타요.
보통 납치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단 순순히 타고나면 나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잔혹하게 밧줄로 묶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난 일말의 의심이나 경계도 없이 냉큼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 트럭은 아까 내가 타려 했던 공유 킥보드 업체의 트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름 모를 아저씨와 등교했다. 아, 짐칸에 실린 주홍빛 킥보드 한 대도 함께. 아저씨는 말이 너무 많았다. 고향은 어디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학과는 뭔지, 학교 생활은 재밌는지, 오늘 수업은 많은지, 이 학교에 들어오려면 어떤 성적을 받아야 하는지, 왜 인서울 학교를 포기하고 지방에 남아있는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질문도, 다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질문도 있었지만 빠짐없이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즐거운 하루 보내라는, 그리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떠났다. 왠지 내가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나는 아저씨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터덜터덜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굳이 왜 나를 태웠을까. 다시 만나지 못할, 설령 다시 만난대도 기억도 못할 사람에게 왜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을까. 이름도 모르는 낯선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선의의 근원은 어디일지 곰곰이 생각하며 하루를 지냈다. 그러면서 수없이 내 삶에 흔적을 남기고 떠난 '다시 없을 사람'이 여럿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나의 생일날 밤에 홀로 집을 나섰다. 생일에 항상 기분이 좋으라는 법은 없다. 욱신거리듯 공허한 마음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무작정 밖으로 나와 근처 공원으로 발을 옮겼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는데 웬 모르는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해달라면서.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모르는 체 지나가려는데 겨를도 없이 질문이 시작됐다. 기운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라도 입 밖으로 꺼낸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무시하려 했는데, 그분이 건넨 질문은 꽤 흥미로웠다. 그렇게 어느새 홀린 듯 대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ㄴ 혹시 카페에 자주 가시나요?
ㄴ 아니요...
ㄴ 앗... 그러면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예를 들면 가격이나, 메뉴 종류 같은..
ㄴ 2층이 있으면 좋더라고요.
ㄴ 아... 큰 규모의 카페를 좋아하시는...
ㄴ 꼭 그런 건 아닌데...
ㄴ 아... 네... 혹시 그럼 카페에 가면 주로 무슨 커피를 마시세요?
ㄴ 딸기 라떼요...
별스러운 대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들키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표정이 재밌어서 계속 대답해 주었다. 왜 늦은 밤에 길에서 질문을 하는 거냐 물었더니, 자신의 친구가 카페 개업을 준비 중인데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중이라고 답했다. 굳이 이 시간에 길에서 물어볼 이유는 무언지 의아했지만 대화에 한 맺힌 사람처럼 별의별 것을 다 묻길래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각종 이야기를 떠벌리다 슬쩍 시계를 봤는데 그새 30분이 넘게 지나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다시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털어놓은 것 같아서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공허하고 우울했던 마음이 괜찮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없을 사람과의 대화는 다시 만날 여지가 있는 사람과의 대화보다 훨씬 즐거웠고, 특별했고, 흥미로웠다.
요즘 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잦아졌다. 어떤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과는 어쩔 수 없이 멀어졌다. 반대로 가까워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자주 만나도 어딘가 불편한데, 어떤 사람은 멀어진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진심의 무게가 그대로였다. 인간관계는 나의 의도와 달리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껏 만난 '다시 없을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사람들과 내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마음과 대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일면식도 없는 미화원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건넨 '오늘도 잘 다녀오세요'라는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은은히 마음 깊이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머니는 왜 이름도 모르는 대학생이 오늘도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라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들은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골똘히 궁리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운전대 옆 빈자리를 양보받고도, 생일날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도, 무척이고 아름답고 따스한 한 마디를 듣고도,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왜 어떤 사람과는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깊어지고, 왜 어떤 사람과는 너무도 당연하게 멀어질까.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멀어져야 할 사람에게 굳이 진심을 떼어주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혼잡스럽고 까다로운 의문들에 대해 책에서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았다.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213-214면)
부딪쳤다면 부서졌겠지만, 스치며 지난 덕분에 오히려 기분 좋은 흔적을 남겨버린 '다시 없을 사람'들을 다시 떠올린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그들은 한 사람의 일회성 지나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결코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과, 너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다는 여러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이미 확인했지만, 그 간극 탓에 오래도록 기억으로 자리할 한 사람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궤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 너무 최선을 다한 나머지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최선을, 너는 너의 최선을. 그러나 그 최선이 잠깐 겹치는 순간에는 너에게 가능한 사랑에 가까운 것을 주려는 마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다시 없을 사람을 아쉬워할 이유도, 사실 그렇다고 더 좋아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멀고 가까운 정도에 관계없이 그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게 전부다.
'다시없다'라는 말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록 찰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게 최선을 다해주었던 '다시 없을 사람'을 이제는 '다시없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시 없어서 소중하고, 다시없어서 소중한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