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익숙하도록 사랑했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랑에 정도가 있겠냐마는, 결코 그것을 얕게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뜻하지 않은 계기로 사랑이 닿기 어렵게 되었을 때 그러하다. 순식간에 외로워지는 가을의 섭섭한 밤, 나의 기쁨과 아픔이 묻은 거리가 더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찔함은 그렇게 문득 스며든다. 내가 있기에 비좁은 세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사람은 투명하게 단단하고, 어떤 사람은 맑게 흐른다. 계절로 비유하자면 겨울과 여름. 누군가는 겨울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여름을 사랑하지. 아무도 없는 도서관 구석에 앉아 해가 지는 순간까지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다. 살얼음, 나는 살얼음 같았다. 씹어야 할지 삼켜야 할지 알 수 없는 식감. 손에 쥐면 줏대도 없이 순순히 흐느적거릴 모양새. 어떤 계절의 전유물도 아닌 것 같은 모호한 굳기. 나는 너무 위태롭고 어중간했다. 길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미처 집중하지 않은 사이에 또 한 페이지의 계절이 넘어가듯, 자주 혼란한 우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그렇게 잠자코 옅어진다. 아쉽지만 나는 걸어야만 한다. 걷는다는 것은 곧 지나간다는 것이다. 지나간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잊고 잊히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 걷고 있을까. 여름일까, 겨울일까. 희미한 차가움과 골격을 갖고 살얼음은 어디로 살고 있을까.
화학에서 반응이란, 어떤 물질이 화학적 성질이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응하는 물질의 분자들이 서로 충돌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두 어개의 분자가 충돌한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분자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반응이 일어날 수 있을만한 최소한의 에너지, 그 이상을 갖고 있는 분자들이 적합한 방향에서 충돌해야만 반응이 일어난다. 방향은 알맞지만 힘이 없는 분자들은 부딪혀도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힘은 충분하나 알맞지 못한 방향으로 부딪혀도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났지만 바뀌지 않는 것이다. 부딪혔지만 그대로인 것이다.
만만하지 않은 하루에 부딪혔지만 무엇도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은 허탈한 밤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탓할 구석을 찾는 밤도 익숙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설처럼 낯설어져 더 사랑하게 되고, 썩 기분 좋지 않은 마음들은 내게서 오래 머물며 익숙해지고 있다. 이 마음이 원래 내 것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해 버리는 내 모습이 무서워지는 밤을 저항 없이 보내고 있다.
나는 무엇이 될까. 살얼음 같은 나는 얼음이 될까, 물이 될까. 아직은 바뀌는 것 없는 하루를 살지만 언젠가 나는 적합한 방향의 하루를 만나 무엇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원했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설혹 내가 사랑한 것들과의 만남이 적합하지 못한 방향이었다면, 무엇도 되지 못한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갖고 있기 버거워 밖으로 끄집어냈던 수많은 문장을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설혹 시간이 훌쩍 지난대도 여전히 나의 눈물이 살얼음이 되어 맺힌다면 그제서 내 안의 추위를 인정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익숙하도록 사랑했던 것들이 낯설어질 때 살짝 사랑을 늦출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만남과 부딪힘은 그렇게 의미를 가질 것이다. 가끔은 아쉽겠고, 가끔은 억울하겠고, 가끔은 놀랍겠고, 가끔은 다행이겠다. 살얼음 위를 걷는다. 언젠가 깨질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될까. 나는 웃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