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친구들
지난주 우연히 윌 스미스 주연의 '콜래트럴 뷰티'라는 영화를 보았다. 콜래트럴 뷰티(Collateral beauty)는 ‘어떠한 부수적인 것에 수반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가장 큰 비극 속에도 아름다움은 있다는 의미이다.
영화 속 하워드(윌 스미스)는 뉴욕 광고회사의 성공한 CEO이다. 그는 삶에서 3가지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 시간, 죽음은 모든 이들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 날에, 더 많이 사랑했으면 하고,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영화 초입 하워드의 대사>
완벽했던 하워드의 삶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교모세포종이란 악성 뇌종양으로 그는 사랑하는 딸을 잃게 되고 절망감과 무력감에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가족, 친구, 동료 모두와 단절된 채 분노와 슬픔 속에 살아가던 하워드는 자신이 삶에 가장 큰 가치라 믿어왔던 ‘사랑, 시간, 죽음'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낸다.
회사의 미래와 하워드를 잃을까 걱정하며 그를 미행하던 동료이자 친구들은 그가 추상의 존재에 편지를 보내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하워드 몰래 ‘사랑, 죽음, 시간’에 각각의 배우들을 고용하여 그의 분노와 의문의 대상들이 실질적인 존재가 되어 연기를 하도록 의뢰한다. 비록 회사의 매각 과정 중 하워드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입증하려는 불순한 의도였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하워드에게 친구들은 그가 분노하고 있는 대상인 '사랑, 시간, 죽음'이라는 존재와 소통하는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하워드의 닫혀버린 삶 속에 노크를 건네게 된 것이다.
영화 속 하워드는 분노한 채 사랑, 시간, 죽음에 물었다.
사랑에게 묻는다. 나는 딸의 모든 것에서 사랑을 느꼈다. 너는 나를 행복하게 했고 그 행복에 눈멀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행복 때문에 고통받고 그 행복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눈뜨게 했다. 넌 나쁜 놈이 아니냐?
시간에게 묻는다. 사람들은 네가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하지만 너는 절대로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게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하지만 너무도 인색하고 부족했다. 왜 내게 사랑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느냐?
죽음에게 묻는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삶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이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주체할 수 없는 비탄은 어쩌란 말이냐?
일상을 덤덤히 살아내었지만 나 역시 영화 속 하워드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었다.
갑작스럽게 엄마를 떠나보낸 후 행복하고 평온했던 나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워드처럼 삶과 죽음의 황망한 시스템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대체 사랑의 하나님이라 불리시는 나의 신은 어째서 그렇게 잔인하게 이별을 만드셨을까 비탄했었다. 비단 우리 가족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이별 앞에서 고통스럽게 무너지는가.
엄마의 발인을 마치고 아빠와 여동생을 친정집에 남겨둔 채 먼저 일상으로 돌아왔었다. 우리 가족의 세상은 철저하게 무너졌는데, 현실의 세상은 무정하게도 똑같이 돌아갔었다. 장례식부터 유품 정리까지 허락되었던 고작 일주일의 시간은 턱없이 짧고도 건조했으며, 몸은 직장에 있었지만 마음은 현실을 살지 못한 채, 엄마와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위로를 수용하는 것마저 힘겨웠던 시간, 영화 속 그들처럼 나의 마음에 끊임없이 노크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감추고 싶은 아픔을 드러내고,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이들. 내게 ‘콜래트럴 뷰티’를 발견하게 해 준 특별한 친구들. 그들 앞에서 나는 온전히 마음을 터놓고 깊은 슬픔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아픔을 자랑하던 친구
엄마를 보내고 일상에 복귀한 첫날 저녁, 집 앞으로 찾아온 그녀의 눈가엔 이미 얼굴도 마주하기 전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손에 든 가방에 담긴 따뜻한 죽, 비타민 한 통, 마음 담아 써 내려간 편지. 넘치도록 담은 그녀의 마음을 본 순간 생각했었다.
'아 나 목 놓아 기대어 울어도 되겠구나.' 11월의 찬 공기 속에서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같이 울었다. 눈물도 대변할 수 없는 그 마음의 이야기를 그녀는 그저 들어주고 또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던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자랑하며 슬픔의 나락에 빠져있는 나를 향한 위로를 두텁게 하였다. 오직 위로가 내게 닿을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주던 친구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눌 에너지조차 완전히 바닥나 버렸던 그때. 그녀는 매주 금요일 저녁 한 시간씩 엄마 이야기를 실컷 할 수 있게 끌어내 주었다. 기억을 꺼내고 눈물을 터뜨리면서 조금이나마 그 슬픔의 크기를 줄여갈 수 있도록, 어떤 날은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어떤 날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수시로 하늘의 사랑을 의심하던 내게 어떤 훈수도 없이 그저 사랑을 부어주시며 알려주었다. 위로란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이고, 사랑이란 온전히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란 걸.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와 함께 울어주었던 친구들. 새벽 기차를 타고 와 말없이 안아주던 친구. 부산에서 출발한 영구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장지에 먼저 와있었던 친구들. 납골당에서 건네주시던 눈물 자국 남아있는 꾹꾹 눌러쓴 장문의 편지. 수많은 시간 동안 엄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주었던 많은 친구들.
그들은 기꺼이 나의 슬픔 안으로 들어와 주었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감사함이 된다고 하는 그 말을 나는 어느덧 이해하게 되었다. 깊고 어두웠던 시간 감당하기 버거웠던 이별의 상처는 이 특별한 친구들의 사랑으로 조금씩 아물어져 갔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아픔의 시간에 이 넘치는 사랑을 흘려보낼 그날을 준비하며 말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아픔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고, 삶 속에서 연결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심화시키며, 그 안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찾아간다.
결국,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통해 채워지고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아픔에 수반되는 아름다움도 있다는 걸 기억해요.
Just make sure your notice the collateral beauty.
비록, 엄마를 죽음에서 돌려주지도 슬픔을 없애주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분명한 것은 슬픔과 고통 안에도 분명 아름다움은 있다는 것이다. 슬픔에 잠식되어 있던 고통의 시간 속에서는 듣기조차 거북했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름다움, 그것은 모두 관계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