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대본집 리뷰
최근 개봉한 ‘서울의 봄’으로 인해, 1979년 12월 12일이 주목받고 있다. 사실 그래서 선택한 건, 아니고, 워낙 대본계의 바이블로 통한다기에 펴 들었는데, 마침 영화가 개봉하여 더욱더 관심을 두고 대본집을 읽게 되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영화와 비교할 순 없지만, 비슷한 시기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며 읽기에도 좋은 작품일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마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에 방영이 되었고, 대본집은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이 대본계의 바이블인 이유는 말 그대로, 작가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작품이어서 그렇다. 미생으로 유명한 웹툰 작가 윤태호 작가님도 이 작품을 필사하며 스토리 공부를 했단다. 정식으로 대본집이 나오기 전,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대본을 직접 제본하여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부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많았단다.
그런 측면에서 대본집을 보자면, 지금의 대본과 달리 대사가 매우 적다. 대사에 비해 배경을 설명하는 지문이 훨씬 길다. 담고 있는 의미도 훨씬 더 크다. 대본집이 없었다면, 드라마를 보며 받아 적는 것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분량도 지금 작품들에 비해 적다. 한 회차당 씬이 60 씬 내외다.
다만, 앞에도 말했듯이 대본 자체에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잘 묻어나지 않아, 혜린과 태수의 감정, 우석과 선영의 감정, 재희를 향한 혜린의 감정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긴 지문만큼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인물들이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일련의 흐름 속에 서 있는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물들이 역사적 사건 속에 놓이도록 스토리를 엮어가는 힘이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 용두사미 드라마들이 난무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 점은 꼭 배워야 할 부분이었다. 캐릭터의 매력이 아닌, 스토리 자체의 힘이 주는 무게감이 중요하다는 걸 일러준다고나 할까.
게다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다루고 있기에, 그러면서도 제 몇 공화국 시리즈 느낌이 아닌, 일상적인 드라마 느낌이라 당시로선 꽤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이 있었기에, ‘1987’, ‘택시 운전사’, ‘서울의 봄’과 같은 영화나 ‘오월의 청춘’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작가님도 감독님도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힘에 대한 이야기는 긴 지문 속에서 드러나곤 했다. 다만,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그때는 선과 악이 뚜렷했다면, 지금은 그 모든 게 혼란스러운 시기다. 정말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꽉 쥐어짜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고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하여튼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의 줄거리는 딱히 이야기할 게 없다. 그보단 가장 강렬했던 장면 하나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 ‘7화 #5 광주로 가는 계엄군들이 소리는 내지 않는 군가를 부른다. 병사들, 있는 대로 악을 쓰는 몸짓으로 군가를 부른다. 우석도 강 일병도 열과 성을 다해 부른다. 소리는 나지 않는 기묘한 합창이다.’
주인공인 우석이 광주로 가는 계엄군이 되어 광주에 들어가기 직전, 나오는 장면이다. 괴기하다는 말만 떠오른다. 소리 없는 아우성 그 자체다. 어쩌면 이들도 광주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게다가 결국 그곳에서 자신의 오랜 친구인 태수를 만난다. 태수는 광주 시민의 편에 서서, 우석은 계엄군이 되어 그를 쏘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후 태수가 끌려간 삼청교육대의 풍경도 비슷하다. 많은 이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거대한 힘이 어떻게 우리를 억누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이 작품의 제목이자, 극 중 인물의 대사처럼, 부디 그 힘들이 언젠가 끝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 읽는 내내 들었다. 어쩌면 작가님도 그런 마음을 갖고 이 작품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모래시계처럼, 한쪽 모래가 다 떨어지면, 모래시계 속 시간이 끝이 나는 것처럼 그들의 힘이 사그라져 버리기를 바라며 말이다.
조만간 ‘서울의 봄’ 영화를 보게 된다면, ‘서울의 봄’과 ‘오월의 청춘’ 그리고 이 작품을 비교하는 이야기도 글로 써 보고 싶다. 각각이 어떻게 독재자를 그리는지, 그 불의한 힘을 그리는지, 그 불의한 힘 아래서 시민들은 어떻게 각자의 삶을 일궈내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2000년대 이후, 드라마 대본에 익숙한 나에게 다소 어려운 작품이었다. 다만, 대본계의 바이블이란 별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역사적 흐름을 스토리 속에 녹여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대본 자체에서 감정을 느끼기 어렵기에, 오히려 배우들의 고민과 역량도 잘 발휘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감독님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
그리고 지금의 이 시간도 언젠가 끝이 있으리란 바람을 실어 본다. 모래시계 속 모래가 한쪽으로 모두 떨어지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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