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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해 Nov 12. 2022

동학교도들이 의회 만들기를 시도했다니?

심지어 우리나라 최초라고?

우리나라의 의회 개설 운동은 동학교도로부터 출발했다.


'동학교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힘은 없지만 탐관오리가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전형적인 민초의 이미지가 생각나지 않나요?


그런 이들이 개화 세력이 주장할 법한, 바깥 세계에나 존재했던 의회 만들기를 시도했다니. 참 낯설죠.


그건 편견이라고 지적한 연구자가 있습니다. 바로 유바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조교수)입니다. 보은집회에 참가한 동학교도의 말을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유바다가 포착한 동학교도들은 세계의 흐름과 같이하며, 의회 개설 운동을 펼치고 있었죠.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2022년 9월, 학술지 《역사연구》 45호에 실린 유바다의 논문〈동학농민군의 민회 개설 시도와 서구 의회〉를 따라 함께 살펴봅시다.



잠깐, 맥락 좀 짚어 보자.


1893년 3월 11일, 수많은 동학교도가 모였습니다. 2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파였어요.


연락, 교통수단도 마땅찮은 시절,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인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보은집회였죠. 이 집회는 왜 열렸던 걸까요.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그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죠.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인간 평등, 사회 개혁이란 메시지를 줬으니까요.


동학교도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자, 당황한 정부는 최제우를 체포합니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였다며 처형했어요. 그렇지만 동학은 오히려 더 널리 퍼졌습니다.


세를 불린 동학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기에 이릅니다. 최제우에게 물었던 죄는 부당하니 철회하고, 동학 탄압을 멈추고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요구했어요.


1892년 11월, 전북 삼례에 수천 명이 모여 지방관에게 진정을 넣습니다. 1893년 2월엔 40여 명의 동학교도가 광화문에 찾아가 직접 왕에게 상소를 올렸어요.


매서운 겨울, 길바닥에 사흘이나 엎드려 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서울 정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죠.


하지만 크게 바뀐 건 없었습니다. 교단 지도부는 이대론 안 되겠다 판단했어요. 제대로 실력 행사에 나서기로 결정합니다. 바로 보은집회가 열린 거죠.


2만 명에 이르는 동학교도가 모여 무언가를 의논한다? 잔뜩 긴장한 정부는 강경히 대응합니다. 600명의 정부군을 파견하는 한편, 청 군대의 동원까지 의논했죠.


한 달 넘게 버티던 동학교도들은 결국 해산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보은집회는 큰 성과를 얻진 못했지만, 동학교도들에게 결속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894년 갑오년,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동학교도들이 뭐라 했는데? 


다시 보은 집회로 돌아올게요. 정부는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합니다.


선무사란 큰 난리가 났을 때 정부에서 파견하는 임시직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소란을 잠재우는 임무를 지녔습니다. 결과적으로 어윤중은 보은집회를 해산시키는 공을 세웠죠.


1893년 4월 1일 보은으로 내려온 어윤중은 동학교도와 접촉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저희들의 이 집회는 조그마한 무기도 가지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민회입니다.

일찍이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고,

조정의 정령(政令)이 백성과 나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래의 일입니다.

어찌 저희들을 도적의 무리라고 지적합니까?


자신들을 도적의 무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항변이었죠. 그런데 그 논리가 참 흥미롭습니다.


여러 나라에도 전부터 민회가 있었다고 한다. 불편한 게 있어 모여서 얘기하고 결정하는 게 근래의 일인데, 우리도 그런 민회를 하는 거다. 뭐가 문제냐? 이런 건데요.


이들이 언급한 민회란 뭘까요? 다른 여러 나라에도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결정하는 곳. 바로 서구 의회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민회라 부르며, 서구 의회와 동일 선상에 두었던 겁니다. 독립협회가 의회 설립을 주장한 1898년보다 이른 시점이었죠.



이 사람들이 민회를 어떻게 아는 건데?


정부에서 발행한 신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죠. 각각 1883년, 1886년에 창간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신문엔 해외의 의회 제도를 상세히 소개한 기사들이 등장합니다.


《한성순보》의 1883년 11월 10일 자 기사의 한 토막인데요.


(서구의) 각 국 정부는 전국 국민으로 하여금 의원을 선거하게 하여 모두 정부에 모이게 해서 법률을 의정케 하는데, 이를 민회라 한다.


이어서 정부는 민회에서 정한 준칙을 따라 정책을 행하고, 예산은 민회에 회부해 결정한다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서구 의회를 민회로 지칭하며 소개한 거죠. 내용이 꽤나 자세했습니다.


다른 일자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의회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등장합니다.  1886년 8월 30일 자《한성주보》에는 일본이 의회를 만드는 상황을 소개하기도 했어요.


정부에서 펴낸 이 신문들은 각 관아에 배포되었고, 일반인도 신청해 구독할 수 있었습니다.


보은집회가 열리기 이미 10년 전부터, 많은 사람이 서구 의회를 뜻하는 민회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당시 정부 관료, 보수 유생들의 글에서도 민회가 언급되는 걸 확인할 수 있죠.


동학교도들도 마찬가지로, 민회의 개념을 충분히 접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죠. 사실 동학교도들이 민회를 얘기한 게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근데 서구 의회랑 같다고 할 수 있어?


그렇다고 동학교도들의 민회와 서구 의회를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느냐? 선뜻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바다는 프랑스혁명으로 성립된 국민의회를 보자고 합니다. 1789년 6월 17일 평민 대표들은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를 구성했어요.


성직자, 귀족, 평민. 이렇게 신분별로 구성된 삼부회를 거부하며 탄생했습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체적으로 의회를 개설했죠.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Assemblée, 즉 "같은 장소에서 어느 정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유바다가 말한 것처럼 "프랑스 국민의회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 시작은 단순히 혁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회였습니다.


보은집회도 말 그대로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서구 의회를 의식하며 본인들을 민회라고 자칭했어요. 이렇게 보면 프랑스 국민의회의 설립 과정과 가깝다고 할 수 있죠.


물론 동학교도들의 민회는 국민주권을 상징하는 권력기구가 되진 못했습니다. 동학농민전쟁도 성공한 혁명이 되지 못했죠.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의회가 만들어지는 흐름 속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의 국민주권 형성 과정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시 동학교도들이 이렇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이걸 포착해 내신 유바다 선생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논문 〈동학농민군의 민회 개설 시도와 서구 의회〉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귀중한 연구 해주신 유바다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역사학계에선 매년 수천 편의 논문이 생산됩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귀중한 연구지만, 읽히는 일은 매우 드물죠. 어려우니까요.


논문들은 계속 새로운 얘길 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논문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재밌고, 상식을 깨고, 의의가 깊은 근현대 관련 최신 논문을 찾아 쉽게 풀어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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