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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폭탄과 유도탄들 Aug 25. 2023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6

민주당에게 2008년 대선은 정권을 탈환할 황금 같은 기회였다. 아들 부시 행정부의 인기가 곤두박질치면서 반대급부로 민주당의 인기가 상승했기 때문인데, 민주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옥석을 고르고 또 골랐다. 민주당의 후보 경선에는 빌 클린턴의 아내이자 상원 의원을 지내던 힐러리 클린턴과 6선 상원 의원 조 바이든, 일리노이 주의 초선 상원 의원 버락 오바마 등이 나섰다. 시간이 흘러 다른 경쟁자들이 모두 사퇴해 힐러리와 오바마의 2파전이 되자 경쟁은 한결 치열해졌다. 힐러리가 먼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부부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으로 장군을 놓으면 오바마가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으로 멍군을 놓고, 오바마가 반전(反戰) 정서를 자극하며 기세를 잡으면 힐러리가 정치고수의 면모를 뽐내며 기를 죽이는 팽팽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사실상 미리보는 대선에 가까웠던 민주당 경선의 승자는 오바마였다. 오바마는 러닝 메이트로 바이든을 지명하며 민주당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한편 공화당의 후보 경선에는 2000년 대선 당시 아들 부시에게 밀려 고배를 마신 존 매케인을 필두로 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밋 롬니, 뉴욕 시장 출신의 루디 줄리아니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선 도중에 줄리아니와 롬니가 사퇴하면서 승기를 잡은 매케인이 무난히 승리하며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대선 국면에 접어들자 오바마는 매케인을 상대로 공화당 정권의 책임을 묻고 반성을 요구하기보다 민주당 정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필하는 전략을 택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과 유색인종이라는 점에서 오는 핸디캡은 노련한 정치인 바이든을 내세워 상쇄했다. 매케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매케인은 거물급 정치인이었지만 동시에 식상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알래스카 주 주지사 세라 페일린이었다. 페일린은 여성이었고 중산층이었으며 워킹 맘이었기에 다방면에서 매력을 뽐낼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페일린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하거나 러시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으면서 본인의 역량이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다. 매케인과 페일린이라는 신구 조화에 흥미를 가진 중도층들이 페일린의 망언에 실망해 그대로 이탈, 오바마에게로 향했다. 매케인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고 관건은 패배하되 그 격차를 최대한 좁혀 훗날을 대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중의 평가는 냉정했다. 개표 결과 오바마는 52.9%를 득표해 36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매케인은 45.7%를 득표해 173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매케인과 페일린은 더블 스코어로 참패를 당하며 쓸쓸히 퇴장했다. 동시에 오바마 행정부의 시대가 열렸다.


#1. 불균형을 균형으로 바꾸다

새롭게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온화한 리더십강력한 무력을 동시에 활용하는 외교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망가진 미국 중심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되 포용만 있어서도, 봉쇄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바마가 택한 것은 포용과 봉쇄를 모두 제시하는 이중정책(congagement)이었다. 균형의 힘(power of balance)은 동아시아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이 주춤하는 사이에 중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면서 한국, 일본과 같은 지역 동맹국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와 안보 분야의 불안요소를 최대한 제거해주어 각자가 책임 있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미중 경쟁의 시대에서 스스로 더 매력적인 세력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을 존중하면서도 중국이 스스로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수용하고 공부하여 확산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중국과 대만 사이의 문제, 이른바 양안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조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만 흡수와 같은 중국 중심의 공세적인 통일 정책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양안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양안 문제, 나아가 동아시아의 현상 변화를 목적으로 중국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또, 북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 정부가 조금 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요긴하게 활용한 것이 바로 한국일본이었다. 일본을 상대로는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 해병대를 괌으로 이전해 부담을 줄여주면서 그 대가로 정보공유를 강화하는 등 협력을 늘려 나갔다. 한국을 상대로는 한미관계를 포괄적, 호혜적, 역동적 동맹이라며 새롭게 정의하고는 중장기적인 미래 비전을 함께 그려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한반도 유사시 한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시작전권을 이양하는 작업을 서둘렀고 북한이 미국과 소통하고 한국을 배제하는 통미봉남 정책을 펼칠지 모른다는 한국 정치권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북미관계나 북미대화보다 한미관계를 우위에 두고 대북정책을 집행하기 전에 한국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한국의 편의를 봐주면서도 미국의 실익을 챙기기 위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도 했다.


오바마가 집권한 시기 국제사회의 큰 화두는 북핵 문제였다. 부시 행정부 시기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여러 독재정권이 전복되는 것을 지켜본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무기를 개량해 국산화하는 한편 이라크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해 많은 돈을 벌여들었다. 이를 이용해 핵개발에 속도를 붙여 핵무기 전력화에 상당한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미러관계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부통령 바이든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을 입안했고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계 계획을 재검토한다면 동유럽 국경지대에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러시아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중국과 러시아에 북핵 문제와 관련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조건으로 내세운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편 북한이 비핵화에 동참할 경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걸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에서 6자회담을 강조했던 것에서 벗어나 6자회담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북미대화 또한 이어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온건한 태도에 북한은 핵실험 등 위협적인 모습으로 응답했으나 2012년 2.29 합의를 채택하며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등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식량을 제공받는 등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바마의 임기 내내 북한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미국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늦더라도 실효적인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이 시기 미국의 전략을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고 일컫는다.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는 비핵화의 바람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핵안보 정상회의가 그 예시이다. 미국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네 차례 핵안보 정상회를 열어 핵무기 문제를 주요 국가의 정상들과 협의해 나갔다. 2009년, 오바마는 프라하 선언을 통해 테러리즘 단체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국제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핵무기를 이용한 테러가 될 것이라며 전 세계가 점진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핵안보 정상회의는 2016년 이후 한 차례도 열리지 않으며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앞서 오바마 행정부가 미중 경쟁의 시대에 주요 국가들이 더 매력적인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밝혔다. 이 전략을 미국에 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미국이 매력적인 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그래서 오바마 행정부는 국무장관 힐러리를 중심으로 소프트 파워(soft power)스마트 파워(smart power)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외교정책을 수립했다. 소프트 파워란 군사력, 경제력과 같은 하드 파워(hard power)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가의 매력을 키우는 데 쓰이는 힘을 일컫는데 리더십가치, 규범, 문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리더십과 규범 등을 전 세계에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매력을 기르고자 했다. 그러나 하드 파워를 경시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기존에 확보한 강력한 하드 파워와 새롭게 창출하는 소프트 파워를 결합한 스마트 파워를 세계질서의 새로운 권력으로 제시해 구(舊) 권력과 신(新) 권력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균형 잡힌 외교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2. 순조롭지 않았던 재선

오바마 행정부 1기의 외교정책들을 살펴보며 오바마가 부시의 재임기에 오른쪽으로 꺾여 굳어버린 미국이라는 트럭의 핸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초보답지 않은 노련함과 특유의 달변으로 무장한 오바마의 리더십 앞에 많은 동맹국이 다시 미국 편으로 돌아서는 등 분명히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 1기를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바마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았고 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1929년의 대공황을 신자유주의자들의 뉴딜 정책(New Deal)으로 탈출했던 추억을 양분삼아 오바마 행정부는 신자유주의자 경제관료들을 대거 등용해 공공개발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의료보험을 개혁(오바마케어)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대중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장애물이었다. 불황은 깊어져만 갔고 집권 당시 오바마가 누렸던 인기의 거품은 가라앉았다.


오바마가 반등하는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2011년 1월, 애리조나 주 투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민주당 소속의 하원 의원 개비 기퍼즈를 노린 이 참사는 6명의 사망자와 18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기퍼즈 또한 범인의 총탄에 좌뇌가 관통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고 현재까지도 총기 규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범인은 20대 초반의 백인 남성 제러드 리 러프너였는데 그는 백인우월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민주당의 정책에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퍼즈로 인해 애리조나 주에 이민자가 많아진 것은 물론 문맹률까지 높아졌다고 믿어 기퍼즈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총기 난사 사건, 그것도 현역 민주당 의원을 겨냥한 테러가 벌어지자 총기 규제에 반대하며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던 공화당이 타격을 받았다. 당시 공화당은 중간선거에서 승리해 의회의 다수당이 되어 오바마케어 폐지법안을 발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 참사로 포기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극 덕분에 오바마 행정부는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반등한 지지세를 유지하기 위해 오바마는 특수작전사령관 윌리엄 H. 맥레이븐이 지휘하는 특수부대에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을 집행할 것을 지시했다. 오바마는 지휘부와 함께 머무르며 작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받았고, 빈 라덴을 사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순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작전이 성공했음을 발표했다. 오바마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웠던 부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지도자가 되었고 미국 대중은 좌우를 막론하고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사살 작전이 주권 국가인 파키스탄의 땅에서 파키스탄 정부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빈 라덴을 사살했다는 사실이 가진 힘이 워낙 강력하기도 했고 테러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싶어한 파키스탄 정부에서 미국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넘어갔다.


오바마의 지지율은 계속 반등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또 변수가 나타났다. 잦은 전쟁으로 인해 팽창된 재정을 지탱하던 미국의 국가부채한도가 한계에 달해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것이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공화당은 협상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증세 정책을 통해 적자를 줄여나가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공화당은 감세 정책과 복지 예산 축소를 통해 적자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부도가 코 앞에 있음에도 공화당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바마는 공화당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면서 협상을 마무리해 위기를 해결했다. 그러자 오바마와 민주당을 지지하던 이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바마의 위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이탈까지 감수하며 국가부도를 면했는데도 국제적인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것이다. 오바마는 즉시 항의했지만 S&P는 국가부도를 모면한 것과 미국이 신용을 회복한 것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오바마는 순식간에 공화당에 굴복한 것도 모자라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호재와 악재가 반복되는 틈바구니 속에서 2012년 대선을 맞이했다. 오바마는 여유롭게 민주당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편 공화당에서는 2008년 대선 당시 매케인과 경쟁했던 롬니와 공화당의 원로로 하원 의장을 지냈던 뉴트 깅리치 등이 경쟁을 펼쳤다. 롬니와 깅리치의 2파전에서 승리한 롬니가 공화당의 후보가 되었다. 오바마는 노련한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사모펀드 비리 의혹 등으로 롬니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한편 안보 의식의 부재를 강하게 꼬집었다. 롬니는 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오바마의 지지자들을 세금도 안 내면서 사회에 불만만 많다고 비하한 사실이 알려져 곤혹을 치렀다. 오바마는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동부를 강타하자 직접 재해 현장에 방문해 복구 작업을 지휘하는 특유의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개표 결과 51.1%를 득표한 오바마가 선거인단 332명을 확보해 47.2%를 득표해 선거인단 206명을 확보한 롬니를 큰 격차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쉽지 않았다.


#3. 비슷하지만 다르게, 부드럽지만 강하게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 2기는 1기와 비슷하지만 다른 정책들을 들고 나왔다. 이 정책들은 모두 부드럽지만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에 제시한 전략적 재균형 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1기 때의 전략적 균형 정책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가지는 영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중국이 미국의 편에 서서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는 데 힘을 보태주기를 바랐던 미국은 중국의 변화가 미미하자 하드 파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중국에 우위를 점하려는 정책을 들고 나왔다. 특히 동아시아 무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해 중국이 더 이상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인권 문제와 지적 재산권 문제, 노동자의 권익 문제 등 1기 때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던 민감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대만에 58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수출하고 동아시아 해역에 해군 함대를 배치하며 중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과의 공존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미국의 경쟁자이면서도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기도 했기에 한반도 비핵화 문제나 이란 핵협상, 기후위기와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의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대화할 뜻이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1기 때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 원칙을 조금 더 구체화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을 내세웠다. 오바마 행정부는 원칙이 엄격해진 만큼 북한이 이 원칙을 수용하고 변화를 택한다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핵화 전략은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유용하지 않았고, 대북 제재만 숱하게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다. 한편 미국은 전 세계의 비핵화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펼치기도 했다. 2015년, 미국은 우라늄 농축 농도를 무기화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는핵협상을 이란과 체결했다. 이는 이란의 비핵화를 위해 미국이 숱한 경제 제재를 펼쳤던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과의 핵협상이 타결된 것을 모범 사례로 삼아 북한과의 핵협상도 이루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핵을 포기할 경우 보상은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동맹국들과 함께 이란에 가했던 제재를 해제하고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란이 아니었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의 비핵화 노력에 지친 미국은 2016년, 한국에 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배치하는 등 힘으로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오바마 행정부 2기가 모범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사례로 많은 이가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의 체결을 꼽는다. 파리협정은 2020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를 대체할 새로운 기후변화와 관련한 협약이다. 교토의정서는 UN의 기후변화협약의 내용을 변형하여 만들어진 협약으로 국제사회에 온실가스를 감축할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경제 제재를 가하는 내용이 명문화되어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의 양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국가나 기업이 온실가스를 배출해야 하는데 제한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국가나 기업에게 배출권을 팔 수 있도록 하여 유연한 온실가스 감축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계도 뚜렷했는데, 교토의정서는 온실가스의 감축만을 규정할 뿐 기후변화를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며,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왔고 앞으로도 많이 배출할 선진국과 비교적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기여도가 높지 않은 개발도상국에 차등을 두지 않고 무조건 감축할 것을 요구해 불평등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협정에서는 온실가스에 더해 다양한 기후의제들을 추가해 보다 확실하게 기후위기에 대응하고자 했으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목표를 다르게 설정해 불평등 논란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파리협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국제사회의 박수를 받았다.


#4. 정리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많은 기대를 받고 당선된 오바마였기에 임기 초반에는 공격적인 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부시와 공화당을 물어뜯기보다 자신과 민주당이 바꿀 수 있다고 외쳤던 만큼 오바마는 요행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공화당과 공화당 지지층의 비토(veto)는 상당했고 오바마의 이상과 미국 대중의 상식은 충돌하는 때가 잦았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 정책이 실패하고 경제 지표마저 나아지지 않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 듯했다. 일각에서는 테러와 자연재해로 자리를 지키는 대통령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2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화당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오바마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층만 바라볼 때가 잦았다. 임기 말의 대통령들은 으레 레임 덕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오바마는 대통령 당선인이 여론전의 귀재 도널트 트럼프였던 탓에 더 힘들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펼친 노력들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는 부시 행정부 시절 무너진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고 신뢰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동아시아를 공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주요한 동아시아 정책의 기틀을 놓았고 이란 핵협상이나 파리협정, TPP 등을 체결하는 현장에 늘 얼굴을 비추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힘을 보여주었다. 경제 지표 역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을 뿐 결과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하긴 했다.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국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낼 때에는 대중들로부터 우리가 아는 그 오바마가 돌아왔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오바마는 경험이 부족한 이상주의자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오바마는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주의가 오늘날 분열된 미국을 만드는 데 일조한 면도 없잖아 있다. 그렇기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한 대통령이었다. 이 점 덕분에 오바마는 여전히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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