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Andrew Carrington Shelton, "Ingres versus Delacroix", Art History 23 (2000)
앵그르 vs 들라크루아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9세기 전반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화가의 회고전이 열렸다. 한 명은 고전주의의 옹호자이자 전통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이고 다른 한 명은 낭만주의의 기수이자 진보적 예술의 리더였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였다. 두 화가의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프랑스 미술이 30년간 걸어왔던 길을 두 화가의 작품을 통해서 살펴본다는 의미와 함께 프랑스가 유럽의 문화 지형을 선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반영했다. 비록 전시 개최 이후 몇몇 평자들은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라는 두 화가의 대결이 19세기 1/4분기 프랑스 미술의 양상을 적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이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시 비평문, 만평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만국박람회에서의 개인전은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설명함에 있어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각각의 사조를 대표하는 화가로 소개되며 둘의 화풍 비교를 통해 각 양식의 특징들을 익히는 것은 상식적인 과정으로 보일정도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1855년의 개인전은 둘 사이의 오랜 싸움을 마무리하고 한 시대를 갈무리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자 커리어 말년에 진입하기 시작한 두 화가들이 새로운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분기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둘 사이의 대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가령 우리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이 1820-183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이해하기 쉽다. 기실 그들의 대립이 각각 커리어의 후반기를 앞두고 있던 1840년대 이후에 점화된 것임에도 보다 이른 시기까지 그것을 소급하는 것이다. 왜 이런 오해가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둘 사이의 대립이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면 당대인들은 어떤 이유로 두 화가를 서로의 대적으로 놓게 되었을까?
앤드류 쉘튼(Andrew Shelton)이 자신의 논문 Ingres versus Delacroix에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저자는 두 화가의 대립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며 그것이 으레 알려진 인식과 다르게 훨씬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대립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에 있어서도 예술적인 이유만큼이나 외부의 사회, 정치적인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은 1824년과 1827-28년이라는 두 시기를 중요한 분기로 파악한다. 이 시기 두 화가는 자신들의 대표작을 쏟아내었으며 살롱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당대에 비평가들은 두 화가를 직접 비교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824년 앵그르가 <루이 13세의 서약>을 통해서 신고전주의의 대표주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을 때 들라크루아 역시 살롱에서 파란을 일으킨 <키오스 섬의 학살>을 출품했다. 그러나 앵그르의 작품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평가들은 두 화가의 작품을 직접 비교할 수 없었다. 1827년 들라크루아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으로 낭만주의 회화의 이정표를 세웠을 때 앵그르 또한 고전주의의 선언문격의 작품 <호메로스의 예찬>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현실적인 이유가 둘 사이의 비교를 막았다. 두 작품은 2달 사이의 간격으로 각각 다른 공간에 전시됐기 때문에 비평가들이 그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그 명확한 화풍 차이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비평가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1831년 들라크루아가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공개했을 때 앵그르는 자신에게 불공정한 처우를 내리는 살롱 심사 기준에 반발하여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1833년 앵그르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초상화 <베르탱 씨의 초상>을 발표했을 때 들라크루아 또한 초상화를 출품했지만 2건의 비평을 제외하면 두 화가를 동시에 언급하는 비평은 없었으며 그 비평 또한 작품 비교가 아닌 들라크루아의 초상화를 비판하기 위해 앵그르의 이름을 언급한 것에 불과했다. 1834년 앵그르가 <성 심포리아누스의 순교>로 자신의 마지막 살롱 출품작을 선보였을 때 비평가들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알제리의 여인들>이나 <낭시 전투>가 아닌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과의 차이를 주목했다.
이렇듯 1824년부터 1834년까지 10여 년의 기간 동안 두 화가는 살롱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엇갈리면서 비평가들의 주목에서 벗어났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각각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배우지만 프랑스 내에서 그들의 지위는 처음부터 공고했던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경우 1824년 살롱에서 '새로운 화파 nouvelle ecole'를 추구하는 대표 화가로 지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파의 리더격 인물로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1820년대 새로운 화파를 언급함에 있어 비평가들이 더 중요하게 여겼던 화가는 들라크루아가 아닌 자비에르 시가롱(Xavier Sigalon)이나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1824년 왕정복고기를 대표하는 평론가였던 에티엔 델레크루제(Étienne-Jean Delécluze)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호메로스주의자와 셰익스피어주의자의 대립으로 설명하며 각 진영의 대표를 앵그르와 베르네로 지목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편 델레크루제에 의해 고전주의의 대표자로 지목되었던 앵그르 또한 고전주의의 기수로서의 지위가 공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전통을 수호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동시대인들에게 거의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전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평자들마다 다른 해석이 존재했다. 이것은 앵그르가 신고전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다비드적인 고전주의와 결별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다비드 화풍에 대한 앵그르의 태도는 고전주의의 기수를 앵그르가 아닌 앙투안 장 그로로 인식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로의 커리어가 꺾이기 시작한 1830년대에 들어서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앵그르의 지위가 확립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 고전주의를 제도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던 왕실이 신고전주의가 아닌 역사적 장르화에 더 관심을 가지자 그러한 지위 또한 위협받게 된다. 이 시기 루이 필리프는 역사적 장르화의 대표주자인 폴 들라로슈에게 작품을 의뢰하고자 했고 이것은 1834년 그가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던 배경이 되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예술계 내에서 앵그르와 들라로슈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파악하며 두 인물 사이의 라이벌 관계를 강조했다.
물론 1830년대 중반 이전에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비교한 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32년 《라르티스트 L'Artiste》에 기고된 한 비평에서 글쓴이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가상" 대결을 상정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두 화가의 대결은) 고전적 천재와 근대적 천재의 대결이다. 앵그르 씨는 많은 점에서 그리스 영웅시대에 속하는 인물이고 아마 화가라기보다는 조각가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또한 그는 선과 형태에 몰두하며 의도적으로 생동감과 색채를 무시할 것이다. [...] 반면 들라크루아 씨는 그가 묘사할 극적인 사건을 위해 드로잉의 엄격함을 의도적으로 희생할 것이다. 또한 소박함, 과묵함 보다 열정, 생동감을 더 중요시하는 그의 방식은 선의 순수함보다 눈부신 색채를 더 강조할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선과 색의 대결이라는 아카데미의 고전적인 논쟁 구도 속에 위치시키고 있다. 즉, 푸생주의자와 루벤스주의자 간의 논쟁이 벌어진 17세기 이후 아카데미 미술 이론에서 중요한 축이었던 선과 색을 두 화가의 주요한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아카데미가 수호하는 전통의 범주 안에 들어갔기에 비평가들에게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저자는 이것이 당대 비평가들 조차 두 화가의 분명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증거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둘 사이의 대립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상투적인 대립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인물이 타협 불가능한 대적 관계로 발전한 것은 1840-1850년대에 들어서다. 특히 1854년 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동시에 파리시청 벽화 장식 주문을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파리 시청 벽화 장식은 두 화가가 처음으로 작품을 맞댄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공사는 큰 주목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차이 또한 당대인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두 인물의 대립은 선과 색의 대립이라는 미술계 내부의 형식 논쟁이 아닌 두 인물 사이의 불화라는 가십거리성 일화들로 채워졌다. 만국박람회에서 들라크루아가 떠난 이후 앵그르가 유황냄새가 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이나 들라크루아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앵그르에 대한 경멸과 조소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는 점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었으며 둘 사이의 악감정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미술계 동정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두 예술가는 서로를 매우 경멸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들의 관계를 마냥 부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두 인물 사이의 악감정이 서로 다른 예술적 지향점(선과 색) 때문에 발생했음에도 그러한 점보다는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만한 일화들로 둘 사이의 대립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시청에서의 맞대결 이후 정확히 1년 뒤에 벌어진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인전에서도 대중들은 작품의 차이가 아닌 악감정으로 인한 불화라는 관점에서 두 인물을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표현 양식의 출현 또한 둘 사이의 대립을 부추겼다. 1840년 이후 언론에서는 살롱 캐리커쳐라는 장르가 등장해 당시 예술계의 상황을 만평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살롱 캐리커쳐는 자칫 난해할 수 있는 예술 비평을 단순화시켜 전달해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때문에 당시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살롱 캐리커쳐가 탄생한 시기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49년 7월 28일 《르 주르날 푸르 리르 Le Journal pour rire》에 실린 삽화는 살롱 캐리커쳐가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인식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삽화가 게재된 1849년은 들라크루아의 두 번째 아카데미 회원 가입 시도가 좌절된 해로 이로 인해 둘 사이의 반목이 언론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때였다. 삽화는 프랑스 학술원 건물을 배경으로 좌측의 들라크루아와 우측의 앵그르가 중세시대 마상시합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두 인물은 각각 붓과 연필을 들고 서로에게 돌진하고 있는데 이는 삽화를 그린 베르탈(Bertall)이 색과 선의 대결이라는 예술계 내부의 논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르탈의 캐리커쳐에서 기존의 수사와는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앵그르의 방패에 새겨진 색채는 환상이다(La Couleur est une Utopie)라는 문구와 말의 장식에 새겨진 루벤스는 빨간색이다(Rubens est un rouge)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두 문구는 제2공화정 시기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떠오르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을 비방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구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이렇듯 정치적 문구를 변형해 둘 사이의 대립을 표현한 것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은 하단에 달린 캡션을 통해 분명해진다.
예술의 공화국. 선의 티에르(Thiers)인 앵그르 씨와 색채의 프루동(Proudhon)인 들라크루아 씨 간의 목숨을 건 대결. 이 대결은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만약 앵그르 씨가 승리하면 색채는 모든 선들로부터 추방당할 것이고 아주 작은 물감 주머니를 가진 반란분자가 발견되면 최고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만약 들라크루아가 승리자가 되면 선은 불법으로 규정되며 심지어 퐁뇌프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조차도 체포를 면치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감히 선과 색채의 융합을 말하긴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고 사치스러운 일이라 그것을 언급했다는 점 외에는 큰 가치가 없다.
베르탈의 논평에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당대에 보수 정치인 티에르와 사회주의 사상가인 프루동으로 비유된다. 이것은 둘 사이의 논쟁이 단지 예술적 논쟁을 넘어 정치 성향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선과 색의 논쟁일 뿐만 아니라 우파와 좌파의 대결로 이해된다. 이것은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한 새로운 분류방식이었다. 이제 화풍은 그것이 가진 내용을 넘어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정치적 성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베르탈의 분류에 따르면 색을 따르는 자들은 사회주의자와 친연성이 있으며 반대로 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 구도는 그것이 가진 예술적인 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 차이로까지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확대 해석이 실제 역사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후대의 연구들이 증명해준다. 널리 알려져 있듯 두 인물 모두 꾸준히 왕실 주문을 받았으며 개인의 정치적 지향점과 상관없이 다양한 인물들에게 작품 의뢰를 받았다. 특히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들라크루아가 정부의 초청을 받아 전시를 열었다는 점은 그가 (실제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위험분자"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몇 차례의 혁명과 급격한 정권 교체를 겪은 프랑스 사회는 문화계의 많은 사건들을 정치적인 범주로 이해했다. 그러한 렌즈에서 대중적 인식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정치적 좌우 대립과 동일시했다. 정치가 예술의 라이벌 구도를 정식화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1820-30년대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두 화가의 차이는 1840년대 이후 크게 두 가지 측면에 의해 대중들에게 널리 인식되었다. 하나는 둘 사이의 개인적인 악연으로 인한 불화로 이는 언론을 통해 다양한 에피소드로 확대 재상산되며 둘의 대립을 예술적 문제를 넘어 개인적 라이벌 관계로까지 발전시켰다. 또 다른 한편 살롱 캐리커쳐의 등장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을 정치적 대립 구도로까지 확대 재생산했다. 이것은 특히 19세기 전반 프랑스가 겪었던 정치적 불안과 함께 날개를 달아 두 인물의 대립을 프랑스 예술의 오래된 대립 구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벌어진 두 화가의 개인전은 그러한 대립 구도를 국가적으로 추인한 사건이자 이후 세대에게 19세기 프랑스의 미술사를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라는 대결 구도로 바라보게 했다. 그 결과 오늘날 근대미술사를 배움에 있어서도 두 인물의 라이벌 관계는 평생에 걸친 숙적 관계로 이해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