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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Nov 21. 2024

역사장르화의 탄생과 그 유산

폴 들라로슈, <감옥에서 윈체스터 추기경에게 심문받는 잔다르크>, 1824, 캔버스에 유채, 루앙 시립 미술관.


원문 : Paul Duro, "Giving up on History? Challenges to the Hierarchy of the Genres in Early Nineteenth-Century France", Art History, 28 (2005)

역사를 저버리다? 19세기초 프랑스에서 장르 간 위계에 대한 도전



하지만 역사화는 어떠한가? 무엇보다 그것이 아직까지도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앙시앙레짐 시기 때부터 사용된 이 낡은 용어가 훌륭하지만 추종자는 적은 어떤 전통들에 적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장르들의 융합에서 벗어난다던가 주류에 들어가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1876년 외젠 프로망탱(Eugène Fromentin)

19세기 전반기 유럽 미술에서 지배적인 장르는 역사화였다. 그것은 아카데미 체계가 확립된 이래 장르 간 위계의 최상단에 오르며 국가적, 제도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19세기 초 역사화는 여러 다른 장르들의 도전에 직면하게되었다. 이 중 역사장르화는 역사라는 공통의 외피를 쓴 전혀 다른 장르라는 점에서 보수적 비평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19세기 초 대중적 인기와 함께 등장한 역사장르화는 왜 탄생했는가? 그리고 이 장르가 일견 유사해 보이는 역사화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폴 듀로의 논문 Giviing up on History? Challenges to the Hierarchy of the Genres in Early Nineteenth-Century France는 이에 대해 다양한 요소들을 지적하며 특히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두 장르의 중요한 차이였다고 지적한다.


장르상의 위계가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던 17세기, 역사화는 신,영웅들의 고귀함을 표현하는 장르로 여겨졌다. 역사화는 외부세계를 모방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같은 보다 추상적인 가치를 지향하고자 했고 그 때문에 장인의 기예가 아닌 예술가의 정신이 반영된 장르로 여겨졌다. 하지만 혁명과 함께 역사화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793년 국민공회는 역사화의 우월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던 아카데미를 억압하고 회원들의 특권까지 폐지해버렸다. 경제적으로도 역사화를 후원하던 왕실과 귀족들이 약화됨에 따라 화가들의 생계가 위험해졌다. 이 시기 화가들은 생존을 위해 역사화가 아닌 풍경화, 정물화 등의 장르화를 그리거나 판화와 같은 다른 매체를 찾아나서야 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된 이후 아카데미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것은 곧 아카데미와 운명공동체를 형성했던 역사화의 부활로 여겨졌다. 실제로 왕실은 부르봉 왕조의 가치를 표현한 역사화가들을 후원하고 살롱에서 이들의 작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귀한 부르봉 왕실과 역사화의 관계는 과거처럼 끈끈하지 않았다. 혁명 시기 제도 개혁의 결과 아카데미는 더 이상 왕실 조직의 일부가 아니게되었다. 더구나 왕실 또한 역사화가 아닌 다른 장르에 눈길을 돌렸다. 1816년 왕실 건축총감인 프라델 백작이 받은 보고서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서 작성자는 역사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왕실의 정책을 나폴레옹 시기 동시대 역사화를  후원하는 행태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이때 보고서의 작성자가 염두해 둔 것은 다름 아닌 역사장르화 혹은 투르바두르(Tourbadour) 장르라고 불리는 회화들이었다. 


역사장르화가 프랑스 미술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801년 비방 드농의 보고서에서다. 비방 드농은 역사 속 부차적이고 사적이며 특정 장면에 초점을 맞춘 회화들이 존재하며 이것이 프랑스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언급하는데 그 이면에는 그러한 회화들이 정권의 안녕과 권위를 제시하는 역사화와는 다른 열등한 작품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왕정복고 시기 역사장르화는 보수적인 평론가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줄 정도로 성장했다. 그들은 살롱에서 역사장르화의 인기에 대해 비판하며 그것이 역사를 저버린 회화라고 비난했다. 왜 역사를 저버렸는가? 그것은 역사장르화가 역사로부터 취할 수 있는 고귀한 가치를 외면하고 단지 외부세계의 재현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진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단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고증과 사건의 정확성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공개 당시 대중들의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인 폴 들라로슈의 1824년작 <감옥에서 윈체스터 추기경에게 심문받는 잔다르크>는 무엇이 보수적 비평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작품은 감옥에서 잔다르크를 심문하는 윈체스터 추기경인 헨리 보퍼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헨리 보퍼트는 잔다르크의 대답에 짜증이 난 나머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 장면은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는 상상된 장면이다. 더구나 화면 속 장면은 역사화에서는 으레 있어야 할 어떤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이 장면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 장면이 어떠한 고귀한 관념을 담고 있는가? 폴 들라로슈의 작품은 그러한 메시지가 아닌 감옥에 갖혀 고통 받은 잔다르크가 자아내는 멜로드라마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화면 속에서 사료의 충실한 재현이 아닌 의상, 제스처, 얼굴 표정의 사실적인 묘사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의 변화가 역사화와 역사장르화의 결정적 차이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역사화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력하지만 역사장르화는 텍스트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역사장르화에게 중요한 것은 고귀한 메시지가 아닌 주어진 역사적 장면이 얼마나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느냐에 있다. 이를 위해 화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화면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드라마적인 순간을 도입하거나 사실적인 묘사로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며 정확한 고증과 디테일에 대한 몰두를 통해 그것이 실제 역사의 한 장면인양 오해하게 만든다. 


따라서 역사장르화는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역사화와 큰 차이가 있다. 역사화에서 역사는 도덕과 이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관념적인 것이 우선시 되었기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역사적 디테일은 희생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장르화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디테일이다. 역사장르화는 역사적 상황 그 자체의 재현에 주력하기에 그것에 담긴 메시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것이 아주 일상적 풍경인지 중요한 역사적 국면인지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질 정도로 중요하고 교훈적인 사건이냐가 아닌 그 당시의 역사적 풍경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을 토대로 저자는 표를 통해 두 장르의 요약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역사장르화의 성장이 프랑스미술에 준 변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크게 3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역사장르화는 역설적이게도 역사화를 범주적 정의를 공고화했다. 살롱에서 역사장르화의 인기는 분명 역사화의 위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장르의 형성은 역사화와 역사화 아닌 것의 장르간 경계를 새롭게 그으며 역사화 본연이 가진 '순수성'을 보다 확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했다. 아카데미와 보수적인 역사가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새로운 장르의 출현이 아닌 장르 자체가 불분명해지는 현상이었다. 때문에 새로운 장르는 그것이 기존의 영역을 침범하기 전에 보다 엄밀히 정의될 필요가 있었다. 1833년 살롱에 역사화도 장르화도 아닌 역사장르화라는 범주를 공식적으로 포함시킨 맥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역사장르화는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언제나 기존의 장르적 규칙을 위반하고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19세기 1/4분기와 2/4분기 동안 역사화가 겪어야 했던 일종의 영역 다툼으로 나타났다. 역사화로 엄밀히 정의될 수 있는 작품은 역사장르화의 대중적 인기에 따라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전쟁에서 두 진영간의 전선이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듯 역사화의 범주는 점점 축소되어 갔으며 그럴수록 이를 공고히 하려했던 제도적, 비평적 노력은 화가들의 큰반발을 일으킬 정도의 반동적 살롱 심사 기준이나 보수적 비평가들의 맹렬한 비난으로 실체화되었다.   


에른스트 메소니에, <작품을 보여주는 예술가>, 1850, 캔버스에 유채, 월리스 컬렉션.


끝으로 역사장르화는 역사화와 이후 등장하게 될 현대생활을 재현하는 회화들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에른스트 메소니에의 작품 <작품을 보여주는 예술가>(1850)를 주목한다. 작품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두 인물이 작품을 보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이 장면이 동시대의 일상적 모습이 아닌 18세기의 모습이라는 점을 알아차리는데 복장과 가구들이 그 시절의 것들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은 그것이 역사화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림 속 장면은 너무나 일상적인 작품 교환 장면에 불과할 뿐더러 심지어 그 시간과 공간조차 정확하게 암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18세기 어느 날의 어떤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상적인 교환. 이것이 작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전부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목격한 것은 역사라는 영원한 과거 속에서 작품의 교환이라는 일시적인 무엇에 불과하다. 아울러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주의와도 결별한다. 메소니에가 제시한 풍경은 사료에 기록된 것이 아닌 그 시절의 복장,장식,가구 등의 고증을 기반으로 상상된 풍경이다. 이것은 자연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거기에 예술가 자신의 상상력을 부여하라고 주문했던 보들레르의 주장과 맞닿는다. 18세기의 복장이 프록코트로 바뀌는 순간 역사는 현대 생활이라는 옷을 입게 될 터였다. 


역사라는 주제를 보다 통속적이고, 사적인 장면들 속에 녹여낸 역사장르화는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영원한 것을 추출해내야 한다는 보들레르의 주장에 많은 부분 부합한다. 다만 보들레르가 콩스탕탱 기스의 작품을 예시로 들었듯 일상적인 것에서 어떤 영원한 것을 뽑아냈다면 역사장르화는 그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 영원한 것에서 어떤 일시적인 것을 포착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대로 역사장르화는 장르화와 현대생활을 묘사한 회화 사이의 일종의 미싱링크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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