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김현영 Apr 11. 2022

최대치의 저항

[세상읽기]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심 판결이 나오고 3년 4개월 만이다. 지연된 판결은 그 자체로 부정의인데, 결과 또한 실망스럽다. 대법원은 해군 함장(당시 중령)으로 근무하던 피고인 A의 강간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고 유죄 판단을 한 반면, 2차례의 강간과 10여차례에 걸쳐 반복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B(당시 소령)에 대해서는 상고를 기각하고 2심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강간최협의설에 대한 재판부 판단이 유무죄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한국의 법원은 폭행이나 협박이 ‘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각해야 겨우 강간으로 인정한다. 유엔여성특별지위위원회를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여성인권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언급하는 게 바로 이 최협의설이다. 최협의설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동의강간죄의 신설인데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법조인들조차 비동의강간죄를 신설하기보다는 판례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판례를 통한 조정은 다른 말로는 사법 정의가 재판부의 뽑기 운에 달려있다는 얘기가 된다. 판례에 맡길 것이 아니라 강간죄 구성요건 자체를 바꾸어야 일관성이 있는 사법 정의가 실현가능하다. 


또 한가지 이 사건에서 주목해서 봐야할 건 피해자의 성적 지향이 쟁점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성소수자라는건 면담을 통해 가해자들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공방과정에서 피해자의 성적 지향은 사소한 문제로 취급되었고 가해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부인되었다. 이번에 무죄판결이 확정된 피고인 B는 피해자와 자신이 유사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며 피해자의 성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적 지향을 무시하거나 자신만은 예외라고 주장하곤 한다. 이 자체가 아주 전형적인 동성애자에 대한 괴롭힘이자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인데도 이 부분은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격럴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사실상 인정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스물 세 살의 나이에 함대의 직속 상관에게 지속적인 성적 위협을 받았던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저항은 어떻게든 자신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로렌 허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Photo illustration by Salon/Random House Publishing)


2021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의 작가 로렌 허프가 공군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살해 및 방화 협박을 당한 것도 스물 세 살 때였다. 공군 이등병이었던 로렌 허프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방화 및 살해협박을 당했다. 동성애자라고 하면 부대 내에서 원치 않는 접근을 대체로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는 성적 지향을 밝히곤 했는데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누군가가 소문을 낸 모양이었다. 협박의 정도는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자동차 유리창에 ‘다이크’(여성동성애자를 지칭하는 속어)라고 쓰고 가는 정도였다가 "칼, 총, 방망이 중에 고르라"는 쪽지가 도착했다. 이때는 2000년. 육군 베리 윈첼 일병이 트랜스여성과 연인이라는 이유로 막사에 있는 동료 군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한 지 1년이 안되는 시점이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로렌 허프는 공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수사관들이 기지 내 병사들에게 허프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괴롭힘에 대해서는 인지했는지를 묻고 다닐수록 허프의 부대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움에 처했다. 어린 시절 사이비 종교집단에 가입한 부모와 지내며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인한 처벌을 받곤 했던 허프에게 공군 입대는 부모와 인연을 끊기 위해서 결정한 일이기도 했다. 공군은 허프가 세상에 소속되고 싶어서 선택한 곳이었지만 끝내 허프를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제복을 입고 그들 중 하나로 섞여들어가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공군은 제대한 허프는 “광신 집단에서 나와서 또다른 광신 집단으로 들어간 것 뿐”이었다는 걸 깨닫고 노숙을 하며 블루칼라 노동자의 삶을 이어갔다. 지금 한국의 군대는 어떤가. 지난 몇 년간 군대 내 동성애자를 색출해서 처벌하고 성폭력 피해자가 군대 내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의 군인권 상황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걸 알고 있는 상관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군인신분으로 이 소송을 진행한 것 자체가 최대치의 저항이었다. 아무도 피해자의 용기가 감히 부족하다 말할 수 없다.


한겨레 세상읽기, 2022-4-4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7453.htm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