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도착음과 동시에 문이 열린다. 엄마 손을 잡고 문 가까이 자리를 잡는 아이. 내 옆에서 속없이 까불던 둘째가 먼저 인사한다. ‘안녕! 난 동이야!’ 아이의 동그란 눈이 둘째를 한번 그리고 나를 한번 본다. 아무래도 둘째의 우렁찬 인사가 부담스러운가 보다. 대답 대신 곁에 있는 엄마 다리를 끌어안자 어른들 사이에 잔잔한 웃음이 감돈다.
“몇 살이에요?”
“네 살이요.”
“와아- 네 살이구나. 얘는 다섯 살이야.”
오고 가는 일정 사이에 잠깐이라도 마주한 이들의 짧은 대화. 아이를 대동하면서 나는 종종 모르는 이들과 말문을 열게 되었다. 창문 너머 풍경처럼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아이에 대해, 육아의 힘듦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아이가 귀엽다, 모자가 더울 것 같다, 가방이 무거울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몇 개월인지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이 없다. 그 시선이 불편하기보다 신기하다. 어쩜 아이에 대한 화두는 이렇듯 편하게 흘러나오는 걸까. 놀이터에서, 동네 마트에서,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며 마주쳤던 할머니, 엄마, 아이와 짧게 나눈 대화가 쌓인다. 이름을 익히고 기약 없이 헤어진다. 만남이 관계가 되는 순간이다.
지인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있는 이 애매하고도 소소한 -아이를 키우며 자연 발생하는- 이것을 육아 8년째인 나는 아직도 적응 중이다. 그래서인지 학교에 간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면 조금 들뜬다. 오늘도 놀이터에 가려나, 누구를 만나려나 어떤 일이 일어나려나 내심 긴장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논다. 어느 날씨 하나 거르지 않고 눈 오면 눈 오는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제철 과일을 먹듯 제철 공기를 쐬러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일주일에 서너 번 놀이터 도장을 찍자 제법 아는 얼굴들이 생겼다. 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달리는 아이도 있고 저 멀리 엄마를 뒤로하고 혼자 오는 아이도 있다.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뭐하고 놀까 묻는 목소리로 텅 비었던 곳이 어느새 가득 차 시끌시끌하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순한 것 같아요.' 나란히 서있던 한 엄마가 운을 뗀다. '네에-' 대답하고 나니 할 말이 없다. 머쓱해져 괜히 주위를 둘러본다. 여유롭게 전화기를 바라보는 다른 부모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의 유년기 풍경 속엔 놀이터가 없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라는 나라가 그랬다. 남자아이들만 뙤약볕에 달궈진 모래바닥 위를 맨발로 누비고 여자아이들은 쇼핑몰 같은 곳을 다니거나 서로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만 조심스레 만났다. 나 역시 밖에서 놀 수 없었기에 마당에 키우던 동물들의 끼니를 챙기던가 흙놀이를 했다. 초등 교과서에 나오는 놀이터(아이가 안심하고 모이는 곳)가 알고 보면 사교의 현장이며 그곳에서 아이들이 관계를 배운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산책로나 시장같이 사람들 모이는 공간이 일상이었다면 달리 컸을까. 불특정 다수라는 이 모를 것은 지금도 편하지가 않다.
'그런데 있잖아요, 나 오늘 여기 다쳤어요.' 한 아이가 나에게 다가온다. 슬며시 내미는 손을 바라보니 반창고가 붙어있다. '저런, 아팠겠다. 많이 다친 거야?' 내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젓는다. '하나도 안 아팠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쟤는 몇 살이에요?' 첫째에게 관심이 있나 보다. 호기심과 수줍음이 담긴 표정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글쎄..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허락을 받은 것처럼 아이는 홀가분하게 놀고 있는 첫째에게 다가간다.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둘 다 엄청난 속도로 어딘가 뛰어간다. 허들이 없는 세계. 어느샌가 내 눈은 아이들을 쫓고 있다. 흥미진진하고 기운 넘치는 그 세계가 어린 시절 동경하던 아주 먼 곳에 두고 온 그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촉촉해진다.
육아라는 무대에 서며 엄마라는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듯, 원래의 내가 아닌 듯 나인 듯한 소소한 페르소나들이 생겨났다. 누구누구의 엄마가 누구누구의 다른 엄마를 만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굳이 생기지 않았을 관계들이 집 밖을 나가는 횟수만큼 만들어진다. 마치 고립된 섬에 아이가 뚝딱거리며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같이. 한데 이 다리를 철거하지 못해 골치 아픈 일도 생긴다. 아이 주변은 활기차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아이 자체가 발산하는 에너지로 꿈틀거린다. 하루하루가 풍족하고 관계로, 사건으로 넘치지만 내게는 너무 과분하다. 놀이터 한구석에서 가만히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 기운을 얻는 것만큼이 딱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인가 보다.
"저는 동이 엄마를 너무너무 좋아하나 봐요." 어른이면서도 어른들이랑 어울리지 않는 나를 아이들은 곧잘 알아본다. 몇 번 대화를 나누고 들어주다 보면 이런 순수한 마음을 비치는 아이도 간혹 나타난다. 그러면 내 안에 작은 아이가 매우 기뻐한다. 그 시절 가지지 못했던 관계들이 아이를 통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이런 대화가 편안하고 즐겁다. 관계에는 애, 어른이 없는가 보다.
사람과 관계와 사탕과 물티슈로 충만하고 복닥이던 하루가 저물면 어른 나는 가스레인지를 끄고, 놀이터도 끄고, 놀이방 불도 끈다. 사방이 잠잠해지면 엄마 자아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 토닥토닥 위로하는 등 뒤로 잘 한일, 못한 일, 후회되는 일들이 스쳐 지나가면 긴 긴 하루의 되집기가 끝난다. 이제 나와도 괜찮아? 그제야 하얀 종이 위로 다른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매일이 이런 숨바꼭질이다. 더 나아가지 못하기도, 까무룩 잠들기도, 나와 또 다른 내가 뒤엉켜 엉망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항상 이 자리에서 나와 내가 조우하고 헤어진다.
사교 현장도 가고, 지인도 잘 만들고, 수다도 무한정 나누면서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는 체력 좋은 인싸 엄마가 분명 있겠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관계가 어렵다. 아이가 불편한 아이가 있듯 어른이 불편한 어른도 있는 법. 누군가의 엄마보다 그냥 나로 있고 싶을 때가 많은 그냥 어른. 그냥의 나는 조금 느슨하고, 구름 흘러가는 걸 보는 게 좋고 어른보단 아이가 편하다. 괴짜 엄마같지만 어떠랴. 엄마 자아와 작업 자아를 넘나들며 나를 알아가는 것 만한 쾌감이 없다. 허겁지겁 저만치 멀어진 아이의 영역을 쫓지만 이내 나의 자리로 돌아온다. 소소하게 작업하는 엄마에게 육아란 이런 것이려니, 조금은 털털하게 넘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