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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May 20. 2022

각자의 콩놀이

둘째가 낑낑거리며 뭔가를 끌고온다. 뭐인가 봤더니 병아리콩을 모아놓은 통이다.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모습이 떠올라 표정관리가 안되지만 애써 말이라도 달리해본다.


'우와, 이걸로 뭐할까~'


 엄마표 놀이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다. 뭐든 입으로 집어 넣던 시기가 지나면 요리 재료를 다듬다가도 통오이를 슬쩍, 씻던 쌀을 슬쩍 내어준다. 자유롭게 잡고, 만지고 노는게 감각을 자극한다기에 특이하다 싶은 것들을 아이 몫으로 쥐어주는 것이다. 아예 온몸으로 뒹굴 수 있게 설계된 놀이터도 있다. 그런 곳에 매일 찾아갈 수 없으니 여의치 않은데로 집에서 만든다. 놀고 나면 난장판이 되는 다른 재료와는 달리 병아리콩은 깔끔하게 정리되는 편이다. 알록달록 식용색소로 물들인 모습도 예뻐 다루면서도 기분이 좋다. 그걸로 개미 길도 만들고, 공사 현장도 재현한다.


아이 발달에 기여하려고 준비했건만 처음 마음과는 달리 손이 안 갔다. 점점 정리가 어려워졌다. 만들기는 간단하다. 여느 '엄마표 놀이'가 그렇듯 시간과 재료가 들 뿐. 욕심부려 서너가지 색을 물들이고 소독제까지 발라 아이들 눈을 피해 넓게 펼쳐 놓으면 마르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물론 세상에 장난감은 많다. 아무리 비워도 어느새 채워지는 손쉬운 장난감들 덕분에 애써 만든 콩놀이는 금새 잊혀졌다. 오늘처럼 아이가 발굴해준다해도 안 보이는 곳으로 굴러갈까봐 자꾸 놀이를 끝내고 싶어진다. 괜히 놀고 있는 아이를 채근한다. 다 놀았다는 대답이 떨어지면 재빨리 빈 통을 대령한다. 정리하자 정리.


육아의 일원이 되며 정리는 선포가 되었다. 물건 정리는  상황 종료의 알림이다. 식탁을 치우면 식사시간 . 장난감을 치우면 놀이의 .  새로운 놀이를 궁리하는 아이들에게 정리는 야속한 처사다. 어른도 귀찮은데 오죽할까. 놀이 종류에 따라서 정리도 다르다. 통에 던져 넣거나 차곡차곡 책장에 꽂으면 끝나는 정리가 있는가 하면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거나 탕에 들어가 씻어야 마무리되는 놀이도 있다. 공들여 준비했는데 금세 끝난것도 모자라 한참 정리해야 하는 놀이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하루를 잘게 아이와 에게 정리도 놀이도 사사롭지가 않다.  양과 질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작업에 진전이 없을 때 주변을 정리하곤 했다. 콩놀이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생각들을 피해 애꿎은 빨랫감을 돌리거나 머리카락을 줍는 것이다. 당시엔 되도록 해야 하는 일정을 회피하려고 시작하던 정리였는데 지금은 원 없이 하고 있다. 이젠 작업시간을 모으려고 정리 시간을 줄이는데 고심한다. 참으로 삶은 균형지다.


정리도 안 하고 아이들도 만족하는 데는 바깥놀이만한게 없다. 놀이터에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이는 시작된다. 한순간에 탐색을 마치고 뛰어들어가 계단을 올라 금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신나는지 계속 웃는다. 첫째가 미끄럼틀에 올라타 미끄러져 내려오면 둘째는 도착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나를 왁 놀라게 한다. 어느새 바닥에 한데 엉킨 아이들이 연신 웃는다. 다음은 동생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첫째가 밑에서 둘째를 놀라게 한다. 이 단순한 놀이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웃으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한다.


시큰둥하게 지켜보다가도 그 물방울처럼 터지는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가가 흐려진다.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책의 한 구절이 그랬다.


인류학자들은 고등 생명체의 특징 중 하나로 '신나게 움직이기 galumphing'를 든다. 신나게 움직이기는 어린 강아지나 고양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수한 놀이 에너지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과장되고 과도한, 아무 쓸모없는 에너지 낭비다. 신나게 움직이기의 예로는 걷는 대신 깡충깡충 뛰는 것, 지름길 대신 경치 좋은 길을 택하는 것, 이런저런 규칙이 많은 게임을 하는 것,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것 등이 있다. 괜히 장애물을 만들어 그것을 극복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놀이는 자유로운 즉흥 작업이고 이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처할 능력을 연마시킨다.*

 

세상에 대처할 능력은 잘 모르겠지만 발바닥이 새카매지도록 논 아이들이 고분고분 집에도 잘 가고 밥도 양껏 먹는다. 이상하다. 아까까지 짜증을 많이 냈던 것 같은데 새찬 숨을 내쉬며 햇빛을 마음껏 쬔 아이들은 물을 먹은 식물처럼 싱싱하다. 나의 시간 아이의 시간 줄여가며 만들던 콩놀이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아, 콩 정리를 하고 있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노래를 배워왔나 보다. 간단하고 부르기 쉬워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정리가 끝났다. 요런 요령이. 바닷가 모래알 같던 콩 부스러기를 다 줍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내 눈치를 살핀다. 아-! 저 웃음은...! 안돼! 아니나 다를까. 말릴 새도 없이 두 손에 단단히 잡고 있던 통을 뒤집는다. 와르르. 바닥에 쏟아져 나온 콩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고분고분 굴던 아이들이 야생동물처럼 돌변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 2차 콩놀이의 시작이다. 나는 정리였는데 아이들은 시작이다. 늘 이런 식이다. 다 된 밥... 아니, 다 끝난 하루의 끝자락을 붙잡고 잠들기가 아쉬워 울고 현관 코앞에서 신발 신다말고 놀이가 떠올라 도로 뛰어 들어간다.


내게 방지턱 투성이 하루가 아이들에겐 순환도로 레이싱만큼 스릴 있고 재미있는 건가보다. 그러니까, 결국 아이들은 논다. 언제든, 어디서든.


사방에서 놀이 소리가 들리는 키즈카페에 와본 적이 있는가. 많게는 열 팀이 넘는 어른과 아이가 어우러지는 공간. 한정된 공간 속에 형형색색 장난감과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 여러 사람들의 대화가 섞이고 여러 아이들의 놀이가 어우러지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준비, 땅- 첫째, 둘째가 흩어지고 소란 한가운데 내가 자리 잡는다. 노트북을 열고 타다닥 자판을 친다. 자아, 이제부터는 나의 놀이다.


*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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