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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G Oct 30. 2021

전류에는 무슨 정보가 숨어있는가

내 연구 주제가 어떻게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

내가 박사학위를 하는동안만 하더라도 내 연구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다른 교수님들을 만나 내가 이러이러한 연구를 한다고 하면 반응은 회의적일 뿐이었다. 내 연구 결과를 국제학회에서 처음 발표했을때에는 발표 후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이 결과가 자신의 연구 주제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가 막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지엽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연구 주제가 지금은 하나의 연구분야가 되었다. 물론, 신생 분야라 저널에 논문을 발표할 때 첨부할 키워드도 없고, 이 때문에 분류도 애매하지만 말이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는 "오비트로닉스"로 고체 내 오비탈 자유도를 활용해 정보소자에 응용할 방법을 연구한다.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일반인에게 내가 연구하는 분야를 설명할때는 이 기초물리학 연구가 어떻게 실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 앞으로 소자기술 산업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를 먼저 얘기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 연구의 출발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지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하는데,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은 아래 질문으로 요약된다. 


고체 내 흘러가는 전자에는 무슨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바로 "전하"이다. 전자의 흐름이 전류라는 것은 중고교 물리학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양자역학을 배우면 전자는 전하 뿐만 아니라 "스핀"이라는 물리량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핀을 쉽게 말하면 우리가 아는 "자석"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 전자는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자석이다. 스핀이 어떻게 흐르는지와는 별개로 물리학적으로 보면 전하와 스핀 모두 흐르는게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스핀이 흐를 수 있다는 가능성은 1980년대에 들어 자성체 박막을 증착시키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를 연구하면서 알게된 여러 기술로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알베트 페흐와 피터 그뤤베그는 이 공로로 2007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뿐만 아니라 스핀트로닉스는 현재 사용중인 DRAM과 SRAM을 대체할 차세대 메모리로 주목받고 있다.


내 박사학위 논문 표지. 내 이름 아래에 그려져 있는 이상한 그림들이 바로 여러가지 형태의 오비탈이다.

여기까지 보면 위 질문은 이미 충분히 답변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박사학위를 하며 알게된 것은 고체 내 흐르는 전자가 갖고 있는 정보는 전하와 스핀 뿐만이 아니라는 "오비탈" 정보도 있다는 것이다. 오비탈의 개념은 대학 1학년때 배우는 화학책에 등장한다. 전자는 원자핵 근처를 행성처럼 빙글빙글 도는게 아니라 양자역학에 따르면 여러가지 형태의 "확률 궤도"가 있는데, 이 확률 궤도를 오비탈이라 부른다. 


여담이지만 대학 신입생때는 양자역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그냥 외웠다 (그래서 내가 화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 3년차에 접어 들어 양자역학을 배우고서야, 오비탈이 뭔지 알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자면 오비탈은 우리가 어릴때 조립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 "레고(LEGO)" 블럭과 같다. 오비탈을 원자의 양자역학적 레고 블럭이라 보면 되겠다.


오비탈은 레고 블럭과 같아서 화학에서 화합물의 구조와 성질, 그리고 여러가지 화학반응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고체에서도 결정구조를 포함해 수많은 성질이 오비탈에 의해 결정된다는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비탈을 단순히 레고 블럭으로 생각하면 오비탈은 고정된 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즉, 고체의 결정구조가 정해졌다면 오비탈의 방향성은 결정구조와 일치할 것인데, 이를 고체물리학에서는 "오비탈 급랭"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때문에 대부분의 자성체에서는 오비탈에 의한 자성 효과가 스핀에 의한 자성효과보다 훨씬 작은데, 이 논의는 대부분 고체물리와 자성체 물질을 다루는 교과서에 소개된다. 


어떤 내용이 교과서 수준의 책에 소개되기 시작하면 이와 상반되는 결과를 주장하기 상당히 어렵다. 대학 혹은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철저하게 본인만의 논리로 컨텐츠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교과서에 소개되는 오비탈 급랭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관측된 실험 결과를 잘 설명하는" 한가지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공부를 하다보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거나,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이런 얘기를 했으니 맞겠지 하고 권위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하며 알게된 내용은 양자역학적으로 오비탈은 하나의 상태만 가능한게 아니라 여러 상태의 중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류를 흘려주거나 외부에서 레이저를 쏴주면 오비탈이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는게 없던 대학원생 시절 (물론 지금도 여전히 아는게 없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있지만), 양자역학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오비탈 전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무식이 힘이었던게, 누구나 다 아는 오비탈 급랭을 나는 잘 몰랐고 누군가 얘기를 해줘서 교과서를 봤는데 소위 "증명 혹은 설명"이라고 나와있는 내용은 너무 제한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나는 교과서의 챕터를 읽고 이미 답을 정해놓고 설명을 만들어 낸 인상을 받았다.


아무튼 나는 오비탈 전류가 고체 내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학회에서 발표도 했다. 그런데 이 글의 초반에 얘기했듯이 대부분 사람들은 이게 정말 가능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내가 발견한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오비탈 전류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다. 개인적으로 꽤 재밌는 부분이라 생각되는데, 대중들은 물리학자를가 수식을 보면 모든것을 알 것처럼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수식보다는 간단한 물리적 "그림"을 선호한다. 예를 들면 입자물리학에서 입자의 생성과 소멸을 당구공이 만나 새로운 공이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으로 보는게 대표적이다. 물론, 본인을 포함한 이론물리학자들은 수식을 통해 현상을 어느정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실험물리학자이기 때문에 실험물리학자들이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이론은 더 큰 분야로 발전하기 힘든게 현살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4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내가 했던 일은 그림이 그려지는 매커니즘을 찾는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식을 전개해 나갈때 수식의 한줄 한줄이 어떤 현상의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게 하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탄생한 논문이 바로 아래 논문이고, 물리학 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에 2018년에 개제되었다. 이 논문은 오비탈 정보가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한 명확한 매커니즘을 제시한 논문으로 이 분야를 대표하는 논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https://journals.aps.org/prl/abstract/10.1103/PhysRevLett.121.086602


그 이후 시간이 흘러 나는 오비탈 전류가 만들어내는 여러 효과들을 이론적으로 예측했고, 2-3년이 지난 지금 내가 예측한 효과들의 주요 부분이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다. 그동안 나는 수 많은 연구 기관에 초청되어 오비탈 전류를 주제로 세미나를 했고, 많은 경우 이는 공동연구로 이어졌다. 덕분에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 (특히 실험 설계 및 검증 등)을 해낼 수 있었고, 하나 둘 싸여가는 연구 결과는 "오비트로닉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분야의 기반이 되었다. 이제 구글에서 orbitronics를 검색하면 본인의 논문을 포함해 많은 논문이 등장하고, 연관된 연구 결과도 잘 소개되는걸 보면 오비트로닉스가 하나의 견고한 분야로 자리잡아가는것 같아 기쁘다. 올해에 들어서는 에디터의 추천으로 처음으로 오비트로닉스 분야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 논문을 통해 더 많은 연구자들이 이 분야에 입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1209/0295-5075/ac2653


이러한 흐름에 맞춰 나는 내년 7월에 오비탈 전류를 주제로 국제 워크샵을 개최하기로 했다. 내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직접 주관하는 워크샵이라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배우는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구자에게 필요한 역량으로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것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연구자 커뮤니티에 화두를 던지고 다른 연구자들을 섭외해서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능력 역히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과거와 달리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 연구는 고도로 복잡해졌고 여러 분야의 협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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