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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Mar 08. 2024

그 시절 나루토를 돌아보며

나루토 (1999~2014) 리뷰

당신이 90년대생이라면 분명 2000년대 투니버스의 황금기를 누렸을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발표한 이래 만화, 음악, 방송 등 수많은 일본 문화가 국내에 들어왔고,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왜색’이 짙은 애니메이션이 대거 방영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닌자를 소재로 한 <나루토>도 있었다.


2000년대 투니버스와 나루토

개방의 효과를 톡톡히 본 투니버스는 2000년대 중반 최전성기를 맞는다. 이누야샤, 아따맘마, 고스트바둑왕, 케로로, 원피스, 마루코는 아홉 살 등 미친 라인업을 자랑하며 케이블 채널 시청률 1위를 밥먹듯이 기록했다. 다시 말해 투니버스의 전성기는 곧 90년대생 청소년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개선, 위상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나루토가 처음 국내에 방영된 2005년엔 ‘4시엔 투니버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인기작들을 집중편성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12시가 지날 무렵 방영되던 카우보이 비밥, 심슨 등의 심야 애니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투니버스는 단순 키즈 채널이 아닌, 성인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의 애니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편성하던 낭만 가득한 채널이었다.


그 영광스러운 시절의 중심에 있던 작품이 바로 나루토다. 왜색이 짙은 애니는 로컬라이징 되기 일쑤였는데, 나루토는 닌자라는 소재 특성상 로컬라이징을 하기 어려웠다.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는 점도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루토의 국내 흥행은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나루토가 문화 개방 전에 출시됐다면 애니는 고사하고 단행본마저 인터넷에 떠다니는 해적판으로 감상해야 하지 않았을까.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키시모토 마사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나루토를 애니로 처음 접하고 금세 열렬한 팬이 되었다. ‘디즈니 르네상스’를 정통으로 지나온 90년대생으로서 인어공주-미녀와 야수-알라딘-라이온 킹으로 조기교육이 되어있었고,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디지몬 어드벤처, 이누야샤 등 일본 애니를 깨우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루토의 진입장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게 나루토에 푹 빠진 초딩은 네이버 붐 오이깎기에 그림판으로 그린 조악한 팬아트를 업로드하곤 했다. 아버지께서 3학년 생일선물로 사준 고가의 타블렛은 고작 1년 만에 고장 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꽤 오래 간 편이었다. 미술을 좋아하다 보니 드로잉에 대한 개념이 생겼고, 고학년이 되어 단행본에 눈뜨기 시작했다.


원작에 흥미를 느끼게 되자 용돈이 생길 때마다 나루토 만화책을 한 권씩 사들였다. 이건 뭔가 싶었다. 나는 한 반에 한 명쯤은 꼭 있던 그림쟁이 포지션이었다.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있었다는 뜻이다. 키시모토 마사시의 작화는 만화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나더 레벨이었다. 3점 투시와 단축법 표현, 로우&하이 앵글의 절묘한 활용, 구도, 비례, 색감까지 정말 완벽했다. 캐릭터 디자인 또한 빼어나 만화를 볼 때 시각적인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키시모토는 신인 작가였으나 데뷔작인 나루토 1권부터 작화의 끝을 보여주었고, 중급 닌자 시험 편의 대박과 함께 나루토는 점프의 간판으로 등극해 3년 만에 애니화까지 진행된다. 1권의 그림체는 우리가 아는 나루토와 사뭇 다르지만, 연재 초반 그림체가 정립되어 가는 과정이었을 뿐 그의 그림 실력만큼은 이미 완전체였다.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TV 도쿄에 첫 방영된 애니를 감상한 키시모토는 너무 재밌던 나머지 제작사 스튜디오 피에로에 작업 속도를 올릴 것을 요청했다. 이때 제작사의 입장은, 얇은 선과 굵은 선을 번갈아 쓰는 필압이 들어가는 만화와 달리 애니는 특성상 필압을 빼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에 그는 단행본의 작화를 그대로 애니로 옮길 수 있도록 1부 후반 사스케 탈환 편을 기점으로 연재 도중 작업 방식을 바꾼다. 지금은 나루토 작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된 ‘필압 없이 일정한 그림체’도 이러한 배경에서 생겼다.


키시모토가 스튜디오 피에로에 애니를 맡긴 이유는 그가 존경하던 애니메이터 니시오 테츠야와 <닌쿠> 때문인데, 정작 나루토 애니가 제작될 시기엔 니시오 테츠야가 프로덕션 I.G로 이적해 제작사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메인 애니메이터는 모리야마 유지가 맡을 예정이었고, 실제로 나루토 1화를 그가 그렸으나 키시모토의 강한 주장으로 니시오 테츠야로 교체됐다고 한다. 다만 니시오 테츠야 특유의 미간이 넓은 작화는 취향을 타는 그림체여서 팬들은 또 다른 작화가인 스즈키 히로후미와 야마시타 히로유키의 작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연재 내내 유지한 안정적인 작화는 다른 만화와 차별화되는 맛살 선생만의 장점으로 인기에 큰 공헌을 했다. 만화는 연재할수록 그림체가 점점 변하기 마련인데, 그의 작화는 1부 중후반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중급 닌자 시험 편을 기점으로 인물 작화에 거의 변화가 없다. ‘캐붕’은 있었을지언정 ‘작붕’은 없었다는 점은 누구라도 인정할 터.


서양인을 모델로 한 캐릭터 디자인을 하면서도 동양인의 신체 비율을 적용해 과장 없이 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한다는 점도 좋았다. 전장에서 싸우는 닌자인 만큼 여성의 신체 역시 전투로 단련된 강인한 모습으로 묘사해 현실적이다. 기능적 복장에 현대적 터치를 더해 특색 가득한 의상도 멋지다. 무분별한 모에화와 성적대상화가 난무하는 요즘 일본 만화를 생각해 보면, 나루토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


나루토 최고의 에피소드는?

1부의 대흥행으로 단행본과 애니 모두 승승장구하던 나루토는 2부의 페인 편을 기점으로 정점을 찍는다. 페인 편은 나루토 역대 최고의 에피소드로 평가받는 만큼 화제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던 시기다. 연재 중후반부로 넘어가며 만화 자체가 무너지자 혹자는 “나루토는 페인 편에서 끝냈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


다만 내게 최고의 에피소드는 중급 닌자 시험부터 이어지는 사스케 탈환 편이다. 전자가 여러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가지각색의 캐릭터라이징과 닌자 세계관을 보여줘 매력적이었다면, 후자는 스토리 측면에서 완벽한 소년만화의 기승전결을 갖췄다. 중급 닌자 시험-나뭇잎 부수기-사스케 탈환까지 연결되는 전개는 숨쉴틈 없이 박진감 넘쳤고, 떠난 동료를 되찾으러 온다는 고전적인 설정, 1명씩 이탈하며 발생하는 1대1 전투는 명백한 클리셰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통쾌한 맛이 있었다. 그 유명한 지로보 대현자의 명언도 이때 나온다.


특히 나루토와 사스케의 관계는 작품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유대를 상징했기에, 에피소드의 끝 종말의 계곡 전투는 큰 상징성이 있다. 우정과 평화 대신 증오와 복수를 선택한 사스케는 만화경 사륜안을 개안하겠다며 나루토를 죽일 결심으로 달려든다. 하지만 심장을 찌르려던 손을 나루토의 가슴에 닿기 직전 구부려 주먹으로 만드는 장면은 그에게 남은 일말의 우정과 향후 개심의 여지를 암시하는 특출난 연출이었다. 한편 나루토는 사스케의 서클렛에 금을 내는 데 성공해 “넌 내 서클렛에 흠집 하나 못 낸다”라던 사스케의 호언장담을 보기 좋게 부숴버리는데, 비록 나루토가 전투는 패배했지만 승부에선 이겼다는 걸 보여준다.


결국 시카마루 소대는 사스케 탈환에 실패했고, 나루토 역시 사스케에게 승리하지 못해 1부의 엔딩은 주인공 일행의 완전한 패배로 끝난다. 주인공이 1부의 실패를 딛고 2부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하고, 나루토와 사스케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탁월한 연출과 함께 둘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복선까지 남긴 수준 높은 마무리였다.


1절, 2절, 3절, 뇌절...

영광의 시기를 지나 후반부에 들어선 나루토는 작가의 단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루토의 장점은 작화, 액션, 드라마, 캐릭터다. 작화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단행본의 액션씬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애니는 작붕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받쳐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게 현실. 키시모토는 방대하게 펼쳐진 세계관을 마무리할 능력이 없었다. 좋은 작화, 매력적인 캐릭터 등 많은 장점은 스토리 설정에 구멍이 생기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게 나루토는 뇌절의 뇌절을 거듭한 끝에 희대의 최종보스 카구야를 등장시키며 산을 넘어 우주로 갔다. 그 과정에서 주연의 캐붕, 조연의 공기화, 설정 붕괴 등 스토리가 무너지면 만화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말았다. 차라리 코난, 짱구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재했다면 중심 플롯을 신경 쓸 필요 없이 닌자 일상물로 전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초기 구상부터 결말의 내용과 플롯의 구조가 전부 정해져 있던 <진격의 거인>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할만하다. 진격의 거인은 에피소드 형식의 장기연재물이 단일 메인 스토리를 설득력 있게 마무리한 최근의 사례로서 매우 모범적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원나블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만화의 완성도는 진격의 거인이 더 높다. 진격의 거인조차 후반부의 급전개로 학살을 옹호했다는 오해를 받고 결말에 관해서도 비판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루토의 결말은 뇌절의 뇌절, 최악 중 최악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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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 나루토로 대변하던 철학 자체를 만화가 스스로 부정했다는 점이다. 소수자, 왕따, 재능이 부족한 범인도 노력과 근성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던 초반부가 무색하게, 사실 알고 보니 모두 혈통빨, 수저론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4대 호카게, 모계 우즈마키 일족은 센쥬 일족의 방계이며 나루토 본인은 구미의 인주력이자 육도선인 아들의 환생인데 이런 그가 어찌 노력을 논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될놈될 세계관의 꼭대기에 선 자의 기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운명론을 정면에서 반박하던 노력파 주인공은 온데간데없고 환생으로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걸어간 금수저가 되어 버렸으니, 대체 누가 이런 이야기를 긍정하고 싶을까? 중닌 시험 편 네지의 일침이 작품 전체를 요약하는 대사가 되어버릴 줄은 키시모토 본인도 몰랐을 것 같다.


4차 닌자 대전의 전후 처리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전범을 처벌하자는 시카마루의 상식적인 건의에 비아냥대는 인물은 6대 호카케 카카시이다. 결국 증오의 연쇄를 끊겠다는 대의를 위해 전범 처벌은 없던 일이 된다. 특히 최악의 전범 카부토와 오로치마루가 멀쩡하게 나뭇잎 마을을 활보하는 모습은 한일 근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떠오르게 해 속이 거북하다. 카부토가 고아원 원장이라니, 그가 만든 전쟁고아만 해도 몇 트럭일 텐데.


그것이 복수와 증오를 세계로부터 단절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나루토의 모든 사건은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며 봉합되는데, 마치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묘사한다. 피해자를 새로운 증오를 낳으려 하는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가해자는 평화를 원하는 선역으로 그리면서 본질을 흐린다.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 아닌가?


나도 이딴 후속작이라면 없는 게 낫다.

그래도 나루토와 히나타의 결혼식을 끝으로 10년 넘게 달려온 만화의 마지막을 나름 해피엔딩으로 장식하고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보루토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나루토의 마지막을 결혼으로 꾸민 이유도 보루토를 연재하기 위해서였다는 검은 속내는 없던 정마저 떨어지게 만든다.


후속작 보루토는 진짜 뇌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히 대단한 작품이다. 그 난리를 떨어서 카구야를 물리치고 비로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줄 알았건만, 고작 한 세대만에 찐찐_최종보스_리얼진짜찐흑막 이러고 있으니. 배틀물 특유의 파워 인플레는 이미 나루토 대 사스케 세계관 최강자 싸움에서 끝을 봤는데, 더 센 놈이 있다?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문제점들은 거론해 봤자 머리만 아프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최근 보루토의 스토리 작가인 코다치 우쿄가 물러났고, 지금은 키시모토의 원안을 바탕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애초에 맛살도 스토리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이미 우주로 간 보루토를 어찌 수습할는지.


편집자 야하기 코스케
현 슈에이샤 제3편집부 차장 야하기 코스케

그래서, 사실 나루토의 본체는 편집자였던 야하기 코스케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점프의 편집부는 전통적으로 내용과 설정에 간섭이 심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드래곤볼의 작가 토리야마가 편집부와 잦은 마찰을 겪었다는 사실은 아주 유명하다. 나쁘게 말하면 간섭일지 몰라도, 편집부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위상의 나루토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초기 구상에 없던 라이벌 우치하 사스케를 넣게 하고, 파도 마을 편을 구상하게 하고, 메인 빌런 이름을 모모타로에서 자부자로 바꾸게 했으며, 중급 닌자 시험 편에 나루토의 동기들을 일제히 등장시키도록 했다. 야하기 코스케는 이타치 사망 편 이후 하차했는데, 바로 그 후부터 캐붕, 설정 오류 등 온갖 뇌절이 잦아졌다. 통제가 심해 보여도 일본 만화계의 편집부는 엄연히 작가와 동등한 위치에서 만화를 한 땀 한 땀 만들어가는 엄청난 존재다.


나루토를 떠나보내며

최근에 나루토 단행본을 정주행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1부까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분명 재미있다. 그런데 2부 페인 편을 넘어 마지막까지 감상하고 보루토의 뒷맛까지 보게 되니 딱 이런 심정이다. 그 이상은 아무 말 말았으면 좋겠다. 나루토에 푹 빠져 팬아트까지 그리던 내 추억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람과 달리 할리우드에서 나루토 실사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혹시 몰라, 원피스 실사판처럼 생각보다 괜찮을지? 그래도 이제 나루토는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



드래곤볼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급성 경막하혈종으로 별세했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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