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방향을 좇아 딸기 농장을 찾아 나섰다. 내가 사는 도심에서는 깨끗하게 포장된 상품으로만 겨우 농사일과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차량에서 건물로, 건물에서 진열대로. 농작물은 도시의 생태계를 따라 움직인다.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면 농작물이 실제로 자라는 자연의 생태계를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로 양쪽으로 푸른 벼가 바람에 흩날린다. 풀냄새를 맡아보려 창문을 내렸다. 젖은 흙냄새와 이름 모를 들풀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가 새로운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길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둑방길이 나왔다, 갈림길 구간에서 좁은 내리막길이 나왔는데, 내비게이션은 그곳으로 차를 안내했다. ‘여기가 차가 다니는 길이 맞나?’ 의심했다. 그럼에도 지금껏 왔던 길을 후진해서 나가는 선택지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지시를 그대로 따라 내리막길을 진입했다. 길 양쪽에는 수풀이 우거져 그것들이 철썩철썩 차체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말고도 이곳을 지난 차들이 숱하게 있었을 텐데 무너지지도 꺾이지도 않은 잡초들의 생명력에 감탄하면서. 내리막길을 지나 평지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좁은 농로를 따라 양쪽이 늘어선 비닐하우스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농로에는 수로로 만들어 놓은 틈이 깊게 파여 있었다. 바퀴가 빠지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확인하며 방향을 틀고 전진했다.
목적지로 정한 딸기 농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맞은편에서 큰 승합차가 한 대 진입하고 있었다. '피해줄 적당한 장소나 퇴로가 없어 보이는데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 승합차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수로를 임시로 막아놓은 구조물을 넘어 논에 터를 단단하게 다져놓은 공간에 철썩 들어갔다. ‘아이고 어떤 감사한 분이 저렇게 길을 터주실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시동이 꺼지고 큰 승합차 운전석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 농부가 풀썩 뛰어내렸다. 오늘 글쓰기 수업에 오신 대표님 중 한 분으로 추측되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여성 농부 글쓰기 수업 오셨나요?” “어머나 선생님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승합차에 뒷 문을 열더니 과채주스가 담김 봉지를 여러 꺼내서 내미셨다. 사과 배 농사를 지어 어린이용으로 건강한 과채주스를 만드는 농부 대표님이셨다. “선생님 같이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오늘부터 나와 함께 6주간 글쓰기 수업을 할 농부님들이 먼저 와 계셨다. 딸기 체험 농장을 운영하시는 대표님, 표고 농장을 운영하시는 대표님이 앉아 계셨다. 6차 산업 여성 대표님들. 내가 이분들을 만난 것은 창업가들의 네트워킹을 위한 밋업데이에서였다. 지원사업 동기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관 기관에서 사업을 진행 중인 대표님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니 낯가리는 성격에 참여가 망설여졌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면 하고 나서 후회하자는 주의.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빠듯해서 등의 핑곗거리들이 많을수록 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마음의 저항을 이겨내고 참석한 곳에서는 언제나 얻는 것이 더 많았다는 경험을 믿기 때문이었다.
밋업데이는 차기 연도 지원 사업에 대한 안내와 질의응답 시간으로 1부가 구성되었다. 2부는 각자 진행하는 사업 아이템을 소개하고, 협업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 대표들끼리 교류하는 시간으로 주어졌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자서전 교육과 출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개와, MVP개발을 위해 책을 출판하고 싶은 대표님들이 있으면 우리 회사를 기억해 달라고 소개를 마쳤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큰 기대는 없었다. 케이터링으로 마련된 다과를 먹으며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딸기농장 대표님이 나를 부르셨다. “저기 대표님, 정말 책을 내주시나요? 저희가 모여서 글을 쓰고 있는데요. 글쓰기도 가르쳐 주시나요?” 눈이 번쩍 뜨였다. ‘이곳에서 나의 MVP를 만들 학습자를 찾을 줄이야.’ “그럼요! 글쓰기 가르쳐 드릴게요. 글을 쓰고 계셨다니 정말 기쁩니다. 아니 어떻게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차차 나누는 것으로 하고, 어떻게 할까요? 우리 한 번 만나서 수업을 하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좋아요! 저희가 찾던 분이었어요. 우리 말고도 두 분이 더 계세요. 농장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죠. 강의 시설도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대표님들도 내가 필요했고, 나도 그들이 간절히 필요한 상태에서 우리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은 서로를 소개하며 시작했다. 서울에서 시골로 귀농한 사연. 어쩔 수 없이 농장을 떠밀리듯 맡아 농부가 된 사연. 마음공부를 하는 방법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까지. 나와 대표님들의 인연이 닿기 전 살아온 이야기는 서로를 만나려고 달려온 운명의 복선처럼 느껴졌다. 수업이라고 거창할 것 없이, 농장에서 갓 구운 고구마와 커피를 앞에 두고 서로의 삶을 듣는 시간을 보냈다. 글로 맺은 인연은 때때로 피보다 진하다. 가족 앞에서도 풀어놓지 못하는 마음을 글에서 얼마나 많이 쏟아내게 될까. 서로의 글을 읽어주는 처음 독자로서, 함께 웃고 울 준비가 된 관계로, 그렇게 묶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