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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윤 Apr 14. 2021

카페에서 밥 먹는 변태와 울보

맛있는 고독 Ep 03


외근 도중 카페에서 식사를 하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끼니를 때우며 서류 업무를 동시에 해야 되는 상황이거나, 대충 배를 채운 뒤 앉아서 쉴 공간이 필요하거나.

전자는 업무가 1순위인 셈이고, 후자는 휴식이 1순위인 셈이다. 결국 카페에서 혼자 먹는 밥은 '식사' 자체가 메인인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스타벅스 에그 에그 샌드위치가 너무 먹고 싶다!'의 이유로 카페를 찾는 날은 없다는 뜻이지.


최근 기억을 더듬으면 휴식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상황이 잦은 편이다. 재작년부터 회사에서 외근직의 사무업무 툴로 노트북 대신 iPad를 지급한 것이 한몫한다. iPad 특성상 MS office 프로그램 사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서류 업무가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점심식사는 보통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 즉 2시간 남짓이다. 식욕보다 휴식에 대한 욕구가 큰 날이면 카페에 가서 적당한 브런치 메뉴와 음료 마시며 나만의 자유시간을 가지는 것이 소소한 힐링이다.


그러므로 외근직에게 '카페'란,
점심시간을 가장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편리한 주차, 다양한 종류의 브런치 메뉴, 거리두기 가능한 널찍한 공간, 사무기기 충전을 위한 콘센트까지! 단연 단골집은 스타벅스DT다.


가끔은 이 얼마나 축복받은 직업인가 싶다.

오전에 고객과의 미팅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해야 할 서류 업무도 없는, 마음에 걸릴 것이 하-나-도 없는 점심시간을 누릴 수 있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에서, 잔잔한 음악과, 맛있는 빵과 향긋한 커피, 통유리창을 통과하는 햇살까지 만끽하는 날이면 그렇게 행복하고 여유로울 수가 없다.

바쁘게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근직 직장인들, 유모차에 태운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커피를 홀짝이는 젊은 엄마, 맥북 뒤에 숨어 열심히 학업이나 취업 준비에 몰두 중인 대학생들을 바라본다. 이 시간이 그들에게도 나름의 힐링이겠지만, 나만큼의 여유는 아닐 것이라 으스대고 싶어 진다. (물론 내게도 밀려오는 업무 전화나 사무 작업으로 여기가 카페인지, 총알 없는 전쟁터인지 모를 순간들도 존재하지만...)






카페에서의 점심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한 여유도 있지만, 하나 더 있다.

바로, '관찰'.


스마트폰 속 속물적인 세상에 빠져있기도 하고 이렇게 혼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시간도 있지만, 묵언수행을 하며 우두커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인생사의 재미와 감동을 목격하곤 한다.


부장급 직장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들도 좋아하는 딸기 요거트 할리치노.


구레나룻 새치 염색을 깜박하신 양복맨 부장님 두 분이서 딸기 요거트 할리치노를 마시며 수다 떠는 모습, 20대 초반 선남선녀 커플의 20분 남짓한 애정다툼의 현장,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는 헐레벌떡 음료를 원샷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남자 등등...


나는 혼자 귀엽거나 우스운 장면을 발견하고 미소 짓는 변태다.


본의 아니게 더 세세하게 관찰당해 누군가의 TMI를 마주하는 경우도 있다.

눈이 시추처럼 커다란 여자가 두꺼운 서적을 읽다가 졸고 있는데 그녀의 눈이 너무 커서 쏟아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긴 머리칼이 이미 컵 안으로 쏟아져 가득 담겨 있었다. 민망해져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조금 전 품위를 잊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남자가 뒤늦게 품위를 챙기며 위풍당당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당당함에 나까지 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개운함은 곧 시원한 개방감으로 바뀌었다. 남자가 바지 대문을 아주 활짝 열고 나온 것이다. 저 대문이 위풍당당의 출처라 할지라도 창피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고, 뒤가 열려서 사라졌다가 앞을 열고 재등장한 남자의 기승전결은 소름이 돋아 추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까지 하고 있으니 진정한 변태가 아닌가?






오늘 점심시간엔 대형병원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의료진들도 찾아오고, 환자들도 찾아오는 이 곳.

불고기 샌드위치와 밀크티, 그리고 차 안에서 마실 보이차를 구입했다.


불고기 샌드위치, 밀크티, 보이차. (기쁘지 아니한가!)


불고기 샌드위치와 밀크티의 조합은 의외로 조화롭고 안정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요네즈 소스와 홍차 향의 컬래버레이션이 제법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카페인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브런치와 어울리는 디카페인 음료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밀크티도 카페인 음료긴 하지만, 아메리카노 1샷 정도의 카페인이라고 한다. 나는 연한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신다.)


허겁지겁 샌드위치와 밀크티를 삼켰다. 이 집 샌드위치가 맛있기도 하지만 배도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간단한 메일을 적는데 몰두하다가 한 목소리가 믹서기와 BGM의 소음을 뚫고 귀에 꽂혔다.


"불고기 샌드위치 두 개요."

나긋한 할아버지 목소리였다. 나른하기까지 했다.


아내로 보이는 할머니가 곁에 계셨고 두 분은 샌드위치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마침 나의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하셨다. 이런 브런치 카페에서 흔하게 만날 연령대는 아닌지라 나도 모르게 타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잠시 거두고 시선을 향했다. 두 분은 말없이 샌드위치 포장을 뜯어 드셨다. 할머니는 작은 입으로 샌드위치를 밀어 넣으려 하니 어색하신지 45도, 90도, 기울여가며 각을 재셨다. 단언컨대 익숙치 않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크게 입을 벌리고 우걱 씹으셨다. 할머니가 한 입 겨우 먹을 때 할아버지는 절반을 해치우셨다.


'귀여우셔. 할아버지는 나만큼이나 시장하셨구나. 할머니는 샌드위치를 자주 안 드셔 보셨구나.'


흐뭇한 미소를 흘릴 뻔하다가 문득 낯선 점을 발견했다. 두 분은 음료 없이 샌드위치만 묵묵히 드시고 계셨다. 챙겨 오신 생수가 전부였다. 그 생수 병마저도 절반이 안 채워져 있었다. 나까지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고민의 현장. 저 혹시 불법촬영으로 잡혀가는 걸까요? 그렇다면 즉시 지우겠습니다.


'내가 산 보이차 좀 드릴까...?'


선의와 오지랖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본체만체 망설이는 사이, 고운 음성이 들렸다.


"따뜻한 물이에요. 같이 드세요."
"고마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장님이셨고, 나는 결국 목이 막히고 말았다. 울컥한 것이다. 난데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혼났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분이 커피를 안 좋아하실 수도 있고, 밀크티는 우유가 섞여있으니 못 드실 수도 있고, 원래 팍팍하게 드시는 걸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보이차를 드리려 했는데 사장님께 기회를 빼앗긴 부아에서 비롯된 눈물일까? 당최 알 수가 없다.


변태인 줄만 알았는데, 울보였구나.


이러한 나의 심정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뜻밖의 시나리오가 찾아왔다.


남편의 MBTI는 INTJ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혁신적이다.



'풉!'


오늘도 난 변태와 울보를 오가며 잠시나마 카페에서 행복했다. 이제 일하러 가자!

울다 웃었으니 새롭게 얻게 될 항문의 털은...... 감수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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