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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8. 2022

연차 신청서에서 사유가 사라진다면

연차를 사용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 없습니다.

어제 연차 신청서를 제출했다. 연차를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다. 연차는 내 권리이니 특별한 이유 같은 건 필요치 않다. ERP에 접속해 연차 신청서를 클릭하여 제목을 적고 연차 일자와 일수 등을 기재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사유' 부분이다. 고민하지 않고 네 글자를 작성했다. 개인 사정.


예전에 회사에서 첫 연차를 사용했을 때 같이 일하는 과장님께서 사유를 간단히 기재하라고 했다. 과장님이 제출했던 연차 신청서를 다시 봤더니 모든 사유란에 내용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사, 병원, 웨딩 준비 등. 연차 사유만 보고도 과장님의 개인적인 상황이 파악되었다. 더욱 적고 싶지 않아 졌다. 회사는 개인이 연차 쓰는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차는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이다. 회사가 판단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해당 날짜에 연차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일 것이다. 맡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일 경우 어느 정도 협의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말하고 있는 과장님의 말을 뒤로한 채 '개인 사정'이라고 기재하여 제출 버튼을 눌렀다. 누가 뭐라고 하면 적힌 그대로 개인적인 일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작성한 모든 연차 신청서의 사유란에는 개인 사정으로 통일되어있다.


곧 제출할 연차 신청서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사유를 다시 훑어보니 고개가 갸우뚱했다. '개인 사정'이란 개인과 관련된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뜻한다. 단순히 일하기 싫어서 연차를 쓰는 나의 까닭은 어째 너무 비루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처리해야 하는 개인 사정 따위는 현재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제출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묘하게 거짓말하는 느낌이 나서 불편했다. 결국 이유를 쓰기 싫어서 작성하는 '개인 사정'도 연차 사유를 작성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 검색 창에 연차 사용 이유를 검색하니 이유로 넣을만한 여러 가지 항목이 나열된 게시글들이 나왔다. 특히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들은 연차를 사용할 때 사유란에 기재할 내용에 대해 매번 고민하기 때문에 그들을 타깃으로 한 글도 많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연차 사유란에 거짓으로 기재하는 이유는 회사에 굳이 사생활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오지랖 부리는 상사가 말하기 싫은 개인적인 일에 대해 집요하게 묻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부하직원은 다음번에는 상사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완전한 거짓 사유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한다.


하지만 부하직원들이 그리 고민하지 않고 연차를 사용해도 되는 법적인 근거가 있다. 연차 사용의 승인/반려는 사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사유를 말하지 않아도 연차를 사용할 수 있으며, 정당한 근거 없는 상사의 연차 승인 거부, 연차 사유에 의한 거부는 불법이다. (참고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110100058) 이쯤 되면 모든 회사의 연차 신청서에서 사유가 사라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중소기업에서는 인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한다. 좋은 인재들은 전부 대기업으로 가거나 복지 좋은 중견, 중소기업으로 가니까. 능력 있는 MZ세대를 잡기 위해 회사 공고에는 너도 나도 '수평'을 강조한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고 보면 수평을 가장할 뿐, 여전히 수직적인 회사들이 많다.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상사들 또한 상상 이상으로 많으니까.


수평적인 회사를 추구한다면 구성원들의 열린 태도와 사고방식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다음은 디테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회사의 작은 디테일에 변화를 줌으로써 구성원으로 하여금 진정 회사가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 연차 사유란을 없애는 것이 이 부분에 해당될 수 있다. 작고 사소하지만 대한민국의 90% 이상의 회사에서 사유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으니 반대로 작성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자체만으로도 큰 매리트가 되지 않을까.


예전에 첫 회사에서 만난, 내가 유일하게 상사로 인정하는 분이 하신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일을 할 때 불편한 거 참고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무조건 할 필요는 없어. 만약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 중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거나 바꿔야 할 프로세스가 있다고 느껴지면 담당 부서에 가서 물어봐.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근데 특별히 이유가 없거나 방식을 바꾸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한 부분이면 네가 의견을 내고, 편한 방식으로 바꿔봐"


건의할 기회가 생길  경영지원팀에 물어볼 생각이다. 권리를 사용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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