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과잉 집합소
나는 현재 한국 대기업 해외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생활과 해외에서의 직장생활을 꿈꿔왔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나만의 작은 꿈을 이뤘다.
한국인이라면 살면서 무조건 들어볼 수밖에 없는 기업이고, 해당 기업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기대도 굉장히 컸다.
우선 나는 그동안 중소기업을 다녔기에, 대기업이라는 미지의 곳들을 경험해보고 싶었고, 왜 그렇게 다들 대기업, 대기업 하는지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물론 해외 법인이기 때문에 한국 본사와 복지를 포함한 여러 부분에서 차이는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외국어를 사용하면서 현지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해외에서의 직장생활 경험이었으니까.
입사가 확정되고 난 이후부터 입사하게 될 팀의 주재원분이 잘 챙겨주셨다. 가끔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때 알아차려야 했던 걸까? 처음 입사했던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실망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나는 매일, 매 순간, 매일 밤 주재원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 했다. 퇴근후에 일과 전혀 상관 없는 본인의 스트레스를 시시콜콜 털어놓은 사적인 메시지와 전화, 술 취해서 보내는 엉망진창 맞춤법이 가득한 메시지, 동료들을 욕하는 메시지 등 이해할 수 없었다. 집 가서 본인 와이프한테나 할 이야기들을 왜 나한테 하는 건지.
해당 법인에서 일하는 다른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에게 소리 지르는 건 다반사요,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니 사람을 앞에 두고 한국어로 서로 욕하고 농담하고 웃는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이러고도 우리가 선진국이라 할 수 있나?
입사 한 달 만에 대기업에 대한 로망과, 똑똑한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궁금증, 중소기업과는 다른 시스템 등의 대한 내 호기심은 전부 사그라들었다. 중소기업과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본인이 너무 잘났다는 자의식 과잉의 사람들.
물론 인성 좋은 주재원분들도 분명히 있고, 이 정도 분위기의 우리 회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 정도가 그나마 나은 편이라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외국 법인 한국 대기업의 취약점은 같은 한국인들이다. 한국이라면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외국 법인에서 발생할 경우 여러모로 대처가 난감하다.
내가 속했던 팀의 주재원의 경우, 사람을 앞에 두고 한국어로 현지 직원 성희롱, 욕, 시답지 않은 농담, 돈 자랑 등을 수도 없이 했다. 정말 역겨웠고, 화가 났다. 무엇보다 현지 팀원들을 대상으로 그런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현지 인사팀 및 한국 본사에 고발을 했고, 해당 주재원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이렇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에서 겪었던 사내 성희롱범들 덕분이다. 한국에서 다녔던 회사들을 통틀어 한번씩 이런 일들이 있었고 그 경험들이 쌓여서 해외에서 나답게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경험들에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참 아이러니하다. 한국 회사 문화는 아직도 썩었다. 갈 길이 멀다.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직장 내 괴롭힘을 두 번이나 겪었다. 같은 팀이었던 해당 주재원과, 다른 팀 주재원.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나무라길래, 조목조목 따져 들었더니 갑자기 회의실 안에 울려 퍼지도록 고함을 질러대며 말대꾸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같은 한국인 동료들에게도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현지 직원들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물 보듯 뻔하지 않은가?
외국법인에서 현지 직원들과 일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한국 문화만을 고집하며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주재원들 중에서도 외국어 못하는 주재원들도 상당하다. 주재원으로 오는 사람들에 대한 자격 요건이 각 기업마다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직접적으로 일하는 현지 사람들은 한국인을 마주한 게 처음일 수도 있고, 케이 컬처가 막강한 현재, 한국문화를 좋아해서 입사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한국의 일하는 방식과 맞지 않다고 무식하게 소리 지르고 욕한다면 국가 망신이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같은 한국사람인 나조차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 몇 차례 겪었는데 그들은 오죽할까.
이미 내가 다니는 회사는 해당 도시에 소문이 났다. 현지인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한국 회사로.
한국의 언론과 스포트라이트를 피할 수 있는 외국법인 회사의 경우 주재원들의 힘이 막강하고, 그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현지인들이 불합리함에 대해 변호사를 고용해 고소하기도 하고, 정부 기관에 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 직원들은 그 마저도 비웃는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이러한 현실이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럽다.
나 또한 가끔 일하다 보면 한국과 다른 문화, 일하는 방식에 답답함이 몰려오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진 않는다. 화를 내는 건 각자의 선택이다. 그들의 문화가 너무나 답답하다면, 기업의 잘못이다. 애초에 회사를 설립하지 말았어야 했고, 설립했다면 그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을 주재원들로 보냈어야 했다. 언어도 제대로 안되고, 현지 문화를 받아들일 줄 모르고, 현지 직원과 융화될 수 없다면 외국 법인에서 일할 자격이 없다.
가끔 현지 미디어에 한국인들의 욕설 영상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해외 한국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정도? 주목하는 한국인들도, 시정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도 없다.
한국 미디어에서 현재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풍자하는 영상들이 올라오지만, 서로 다른 세대를 조롱하며 웃음거리 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한국 사회, 더 좁혀서 한국 회사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해 보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