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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y 11. 2024

시부모님을 모셔다 드리는 불편한 마음

"참 강인한 분이시로군요."

막둥이를 상담하기 위해서 간 클리닉에서는 부모의 검사도 같이 진행했다. 담당 선생님은 부모의 마음 건강 상태는 모두 양호한 편이라면서 다만 결혼생활에 회의적이라고 적은 부분에 의아해하셨다. 나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결혼하고 십수 년간 신랑의 소득과 직장이 불안정했고, 아예 없었던 기간도 상당했으며 혼자서 6 식구가 아닌 플러스 2, 즉 시부모님에 관련된 것까지 많이 감당해야 했던 것이 좀 많이 힘들었다고. 


그러자 선생님은 그런 힘듦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면서 참 강인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맞다. 나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편이다. 아무리 힘든 일도 보통은 하룻밤 자고 나면 회복이 되어 있다. 어쩌면 내가 가진 여러 장점들 중 제일 감사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생각난다. 셋째를 임신한 몸으로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나는 작은 방으로 와서 밤새도록 번역을 했다. 싸구려 조립 컴퓨터가 펑하고 폭발할 때에도 나는 내가 작업한 파일이 다 날아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번역을 하다가 결국 불어나는 빚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전세를 빼서 월세로 돌리고, 일부 상환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부채의 총액을 줄이면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았다. 


그 계획을 알게 된 시아버님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에게 직접 한 것은 아니고 물론, 신랑에게였다. 전세금을 다 상환하지 말고 일부를 당신에게 달라는 것이다. 말씀은 빌려달라는 것이었고 조금씩 나누어 갚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때 신랑은 소득이 없었다. 육아휴직을 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잠을 자는 시간과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번역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그 상황을 아시면서 그 돈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결국 그 돈은 시부모님에게 갔다. 셋째를 낳고 나온 출산휴가 동안의 월급으로 시부모님이 속한 다단계 회사의 고가 정수기를 사는 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수소수 정수기라고 수소수를 마시면 모든 병이 치료되고 건강해진다는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를 두 분은 몇 달이고 하셨고 신랑은 "와이프가 출산 휴가로 받은 돈이 있으니 괜찮아요."라면서 그 정수기를 냅다 사 버렸다. 한밤중에 나와서 업소용 정수기처럼 거대한 그 정수기를 울면서 발로 차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자를 부담할 테니 내 명의로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 매주 최소 이틀 이상 우리 집에 오시면 당연하게 안방 침대에 누우시던 모습이나 수시로 보내는 다단계 제품 홍보 문자 및 사라는 강요, 기승전 다단계 제품 예찬으로 끝나는 것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참아 보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 다단계 회사에서 하는 봉사활동에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것에서 나는 정말 너무 화가 났다. 기어코 아이들을 몇 번을 데려가시던 중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집회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차라리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신랑이 이러한 고통에서 나를 전혀 보호해 주지 않았던 데에 있다. 네 명의 아이를 이 년 간격으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나는 정말 착하고 말 잘 듣는 며느리로 웃으면서 다 받아들였다. 시부모님이 오셨다가시는 날은 어김없이 말다툼이 일어났고 잠잠해질 만하면 사나흘 뒤 다시 오셨으니 이 일의 반복이었다. 제발 다단계 제품 이야기라도 하지 말도록 간곡히 부탁을 해도 신랑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외에 글 하나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십수 년 동안 쌓여가면서 나는 서서히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그분들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견디기 너무 어려웠다. 애써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대화를 하지만 오랫동안 거듭 난 상처로 채 아물기도 전에 반복적으로 난 고통이 이제는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나를 짓눌렀다. 


신랑은 나에게 왜 교회에서 만나면 친절하게 대하지 않냐고, 사람들이 다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신랑에게 이러한 일들을 다 말했다. 남편은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기가 막혔다. 그동안 울면서 호소한 것들은 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신랑은 울면서 호소를 한 것은 보았지만 다시 추스르는 모습에 괜찮은 줄 알았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은 일로만 여겼다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말다툼과 간곡한 호소는 그에게 그냥 스쳐가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오늘은 결혼식이 있었다. 집에서 차로 최소 한 시간 거리. 그런데 그 결혼식에 우리 부모님도 와 계셨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들이라는 것은 몰랐다. 식사를 끝내고 인사하고 가려는데 엄마가 물으셨다. "시부모님 모셔다 드리는 거지?" 여러 사람 앞에서 하시는 말씀에 나는 말을 못 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시부모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기도 하고 식사도 하고 여러 가지를 다 해낸다. 그러니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 오후는 둘째 전시회도 가 봐야 하고 다른 일정들이 좀 있었다. 모셔다 드리고 가면 최소 20분은 더 돌아가야 하니 고민이 되기도 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오늘은 조금 더 있었다.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정작 말을 꺼낸 엄마는 당황하셨다. 나의 빠른 회복탄력성은 아마 우리 엄마에게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또 나는 엄마처럼 강하지 않다. 정말로 나는 아무리 해도 우리 엄마의 그 강인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가 모셔다 드리지 뭐." 그런데 엄마는 차를 안 가지고 지하철로 오셨다는 것을 잊으셨다. 당황하신 것이다.


사실 시아버님은 요새 살짝 치매 기운이 있으시다. 그래서 예전 일은 잘 기억하시지만 요새 일은 금방금방 잊으시고 반복해서 같은 것을 물어보실 때가 잦다. 그 시아버님을 챙기시는 시어머님의 마음과 노고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나를 그렇게 아프고 어렵게 하신 분들이 또 힘들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편치 않다. 시부모님 댁은 지하철을 타면 금방이지만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곧 비도 올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두 분은 말로만 한 번 사양하시더니 바로 차에 타셨다. 시부모님 댁은 큰길에서 한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골목이 복잡한 데다가 비까지 오기 시작해서 30분이 더 걸렸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모셔다 드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와서도 오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엄마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렸기 때문인가. 엄마에게 전화해서 모셔다 드렸으니 안심하시라고 전화라도 드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아직도 마음이 좀 힘들다고 알려드려야 하는 것일까. 그 무엇도 못하겠다. 우선 엄마는 내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신다. 동생에게 나를 칭찬하는 말로 하신 것 중 하나가 언니는 결혼해서 시댁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굳이 안 좋은 일들을 다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어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강은 아실 수밖에 없다. 그 다단계 제품들을 시부모님이 직접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아시는 모든 분들께 다 드리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물으시면 나는 간단하게라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깊이 묻어두고 그냥 지나갈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매주 교회에서 뵈어야 하고 가족행사가 많으니 이는 이대로 지켜야 한다. 


차라리 대놓고 '저는 이래서 너무 아프고 속상했어요'라고 말하면서 풀면 나을 것 같은데, 신랑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해를 못하실 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는 너무 복잡하고 헝클어져서 하나하나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서운한 당사자는 두고두고 기억하지만 상처를 준 이들은 그게 상처인 줄도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아플 줄은 몰랐다. 위에서도 썼지만 정말 하루 지나면 다시 웃으면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을 거라는 마음으로 넘기고 넘긴 것들이 이렇게까지 쌓일 줄 30대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아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팠어도 대부분은 어떻게든 다 풀고 갔기 때문에 괜찮았던 것 같다. 말로 풀 수 없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관계이니 이렇게 골이 깊어질 수 밖에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래, 이제 알겠다.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이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쿨하게 넘겨버리기엔 내 마음이 그렇게 넓고 깊지 못한가 보다. 대범한 듯 보여도 소심한 나는 별다른 계기가 없는 한 이대로 평생 마음에 묻고 끌고 그렇게 가겠지. 나가서 비오는 길을 한 바퀴 돌면서 이 마음을 마저 다독여야겠다. 




저녁 내내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글을 길게 적었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힘든 자극들이 아픈 것은 사실이고 쌓인 상처들도 여전히 쓰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제가 잘 서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마흔이 넘는 삶을 살면서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저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삶은 참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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