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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22. 2024

돌려보내는 것도 일이다

아무리 무료 반품이라지만...

오늘 저녁은 연주회! 간간이 작은 음악회는 했지만 진짜 정식 무대에 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것도 소규모홀로는 나름 잘 알려진 모차르트 홀! 어쩐지 의상도 좀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과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예쁘고 무대에 어울릴만한 옷으로. 평상복이지만 무대에 서도 괜찮을 스커트와 블라우스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뭔가 드레시한 옷이 입고 싶었다. 가격은 과하지 않게.


쿠팡에서는 롱드레스가 많이 있었다. 예전에 몇 번 쿠팡에서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시켜보고는 바로 반품한 기억이 좀 있어서 망설여졌다. 후기를 봤다. 괜찮다고 한다. 보통 반품 세일이 많으면 아슬아슬하다. 후기가 적어도 아슬아슬하다. 후기가 어느 정도 있고 반품 세일이 적은 것으로, 그리고 딱 봐도 길이가 길어 보이고 상세 사진을 몇 번이나 살핀 다음에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은 것으로 세 벌을 골랐다. 무대에서는 신발도 중요하다. 연주자의 발만 쳐다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대용 구두가 주는 자신감은 무시하지 못한다. 뒷굽에 반짝이 보석이 박힌 핑크색 스트랩슈즈가 있긴 하지만 검은색으로 하나 사고 싶었다. 찾고 찼다가 5센티미터 가냥 되고 보석도 적당히 박힌 신발 하나를 발견했다. 


어제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오니 물품이 와 있었고 고맙게도 막둥이가 다 개봉을 해 주었다. 이젠 택배상자와 비닐을 뜯는 것도 너무나 성가시다. 막둥이가 개봉한 이유는 자기가 부탁한 보드게임이 있을까 싶어서이다. 열심히 하나하나 뜯어 주었는데 아이가 찾던 그 보드게임은 내일 온다. 그리고 옷을 보는 순간, 실망감이 확 밀려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천이 얇은 것은 그렇다 쳐도 일단 싸구려 티가 확 났다. 조금 괜찮다 싶은 옷은 길이가 심각하게 짧았다. 나는 화면상에서 연출된 최소한 종아리를 덮는 긴 드레스를 원했는데 이건 무릎까지 밖에 안 온다. 바로 차곡차곡 접어서 그대로 다시 포장지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홀터넥 드레스. 후기가 정말 좋았는데 일말의 기대감으로 개봉하고는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착용해 보았는데 이건 그냥 잠옷을 걸친 것 같다. 역시 바로 예쁘게 접어서 비닐백에 넣었다. 


내가 본 후기에는 이런 말들이 쓰여 있었다.

'쿠팡에서 옷 사보고 실망해서 잘 주문 안 하는데 이 옷은 정말 괜찮았어요. 가성비 괜찮고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색으로 재주문합니다.' '하객룩으로 괜찮았어요. 옷이 예쁘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문장에 혹한 것이 내 잘못이었다. 아니면 옷의 목적이 달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웬만한 옷은 그 가격에 기반한다는 기본 법칙을 무시한 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이제 신발 차례다. 조심조심 상자를 열어 보는데 아아.... 보석이 너무 싸구려티가 난다. 초록색으로 번쩍번쩍한 이 보석은 어쩌면 무대에서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신발의 착화감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뒷굽이 가늘지만 의외로 탄탄해서 걸을 때 안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신발을 신을 수는 없겠다. 딸이 보더니 소리친다. 

"구려!" 

그래..... 나도 알아..... 눈물을 머금고 다시 조심조심 포장한다. 


20만 원 가까이 시켰는데 건진 것은 아이들이 물놀이할 때 막 신어도 괜찮을 스트랩 샌들 하나뿐이었다. 기대 없이 산 것이 제일 괜찮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시 앱을 열고 주문 목록을 찾아 반품 버튼을 누른다. 쿠팡 회원의 좋은 점이 무료 배송, 무료 반품이 되는 것이라지만 이것도 참 귀찮고 또 미안하다. 포장지가 다시 버려질 것을 생각하면 환경파괴에도 일조하는 것 같다. 뜯어진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박스용 테이프로 꼼꼼히 붙인다. 


이것으로 끝났다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을 것이다. 한 번 정도의 반품이야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좀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우선, 요새 애용하던 가방이 많이 낡아서 휘뚜루마뚜루 막 편하게 쓸 쇼퍼백이 필요했다. 전에 쓰던 좋은 가방들은 가방 끈이 해져서 백화점에 AS를 맡겨야 하는데 가기가 너무 귀찮고 시간이 없었다. 비싼 가방을 사 봤자 자꾸 닳아버린다는 것을 알아서 예쁘고 좋은 가방은 저쪽에 두고 매일매일 편하게 쓰는 가방은 이제 착한 가격 버전으로 사기로 해서 또 쿠팡앱을 열었다. 가방을 보다가 딸이 자기는 캔버스 백을 사달라고 해서 그것도 두 개 넣었다. 


아이들이 어제 샌들을 보고 신어보더니 맘에 든다고 각각 사달라고 해서 또 두 켤레를 추가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십만 원이 또 훌쩍 넘었다. 이러다가 삼십만 원은 일도 아니겠다. (사실은 넘었는데 빼냈다...) 분명히 필요한 생필품만 넣은 것 같은데 왜? 하지만 내 가방은 진짜 절실하다. 나름 괜찮다고 산 질 스*** 브랜드 가방이었는데 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걱정이 된다. 내일 새벽에만 다섯 개의 물품이 배송될 텐데 그것도 반품을 안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두 개는 반품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료 배송 무료 반품이니까 '일단 시켜보고 비교해 본 다음 맘에 안 드는 제품은 반품해야지!'라는 못된 마음이 있다.


물품을 회수해 가시는 분의 마음도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이 집은 이렇게 시키고 반품을 계속하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실까 반품을 무더기로 내놓을 때마다 지레 마음이 찔린다. 그래서 이렇게 몇 번의 배송과 반품을 해 본 다음에는 한동안 뭔가를 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쓴다. 우리 집만 이런 게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그러다 이렇게 한 번씩 터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무료 반품이 되니까 너무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쓰지도 않을 물품을 쟁여두었을 것 같다. 아니. 아예 사질 않았으려나...? 내가 이래서 쿠팡을 탈퇴하려고 했었는데 새벽 배송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진짜 탈퇴 버튼을 누르니 쿠팡이 내게 딜을 했다. 한 달간 무료로 연장해 줄 테니 (원래 초반 무료 기간 제외하고) 계속 써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 추가 무료의 맛을 보고 나니 도저히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책도 무료 배송이었다. 애용하는 온라인 서점들 모두 최소 15000원 이상 사야 하는데 말이다. 매일매일 토스에서 10원씩 적립을 받는 것도 다 쿠팡에 접속해야 하니 하루에 최소 세 번은 쿠팡을 만나게 된다. 욕을 하면서도 끊을 수 없으니, 어쨌거나 정말로 전략을 잘 세운 점 만은 높이 사고 있다. 그래도 최대한으로 저항하고 싶은 마음에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물품들 몇 개를 파파박 삭제해 버렸다. 나름의 노력이다. 애쓴다 진짜. 당분간 반품은 그만해야지. 그러니까 그만 사야지. 내일을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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