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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Jul 19. 2023

반복만이 살길

한문을 잘하는 특별한 방법은 따로 있지 않다

“아! ‘신첨수함(新添水檻)’ 다음에 뭐였지?”

“뭐더라? 무슨 ‘조(釣)’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날씨가 따뜻해 맑은 하늘도 볼 겸 점심을 먹고 동기들과 산책을 나온 참이다. 누가 한문쟁이 아니랄까봐 주거니 받거니 외우고 있는 구절은 지난 주 수업한 두보(杜甫)의 시(詩)다. 수업 이후로 한번도 다시 책을 들춰보지 않은지라 외는 구절이 없어 입을 앙다물고 있자니 연장자로써 체면이 서질 않는다. 열심히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직 휘발되지 않았을 기억의 단편을 뒤져본다.     


“거기 백어(白魚)가 낚시를 물지 않는다는 구절 있지 않았어?”

“백어요? 누나, 제가 배운 부분 시 본문은 다 외웠었는데 백어는 안나왔어요.”

“아 그래? (머쓱..)”

“아마 그거 주석에 나온건가봐요. 와~ 언니 주석도 다 기억이 나요?”   

  

역시 너희들은 마음이 착하구나. 어떻게든 좋게 봐주니 말야.

나중에 찾아보니 백어는 배운 곳이 아닌 예습한 부분에 있던 구절이었다. 왜 배운건 기억 못하고 배울건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앞서가는 급한 성질머리가 기억에도 영향을 주는가보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앎이라 하지 않으셨던가. 이후로 완벽한 청자(聽者)의 입장을 지키며 산책을 마쳤다.      

다른 어떤 일이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한문을 잘 하는 바른 길 역시 꾸준한 반복만한 것이 없다. 성실하게 읽고 또 읽는 사람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용》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보다 능력이 좋은 남 탓을 할 것이 없고, 그저 성실히 그보다 더 열심히 하라고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질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 군자의 학문은 일단 시작하면 이루어내는게 중요할 뿐 중도에 그만둬서는 안된다는 격려이기도 하다.      

남이 한 번에 해 내면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해 내면 자신은 천 번을 하라.
人一能之己百之,人十能之己千之         

본문을 다 외웠다는 동기 역시 타고난 암기천재여서가 아니라 시도때도 없이 읽어 이룬 결과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다 안다. 툭 치면 글귀가 툭 나오는 터라 나는 그를 고전자판기라 부른다.

고전자판기의 책을 보니 이 시만 벌써 25번을 읽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픈 만고(萬古)의 진리인 만큼 이 반복의 중요성을 이번 학기 실습 중에도 볼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로 번역 실습 중인데, 여기에는 임금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업무 얘기를 했는지, 무슨 공부를 했는지, 심지어 어젯밤의 건강상태는 어떠했는지 등이 시시콜콜 적혀있다.  1758년 5월 어느날 영조(英祖)는 관원들을 데려다 《서경(書經)》 으로 시험을 봤다. 평소에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하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시콜콜한 기록이 적혀있다고 말했듯이 시험을 마치고 난 뒤 임금과 신하들이 나누는 뒷얘기도 적혀있다.     


"아무개는 글을 잘 읽는 것을 보니 이해를 잘 하고 있습니다."

"아무개는 그 아들도 공부를 잘 하기로 유명합니다."

"아무개는 구(句)를 제대로 떼지도 못합니다."     


이날 시험을 보인 여러 명 중에서 제일 잘 했다며 칭찬을 받은 사람에게 영조가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묻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무려 500번을 읽었다고 한다. 자랑할 만한 사람이니 이름도 남겨보자. 갑술년(1754년, 영조30)에 시행한 증광시(增廣試)에서 급제한 노문(老文) 이창섭(李昌爕, 1719~?)으로 관직에 나온지 4년 밖에 되지 않은 관원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제술(製述)로 급제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강경(講經)을 잘 하니, 그 능숙한 공부를 알 만하다. 너는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가?”

하니, 신 이창섭이 아뢰기를,

“전후로 500여 번을 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많이 읽었다. 이와 같이 많이 읽었으니, 어찌 능숙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정보가 아뢰기를,

“능숙한 공부는 속일 수 없습니다.”하였다.

     

제술(製述)은 글짓기이고, 강경(講經)은 경서를 외우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500번이라는 숫자는 옛 사람들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숫자였던 모양이다. 나역시 한문 공부를 시작한 뒤 《논어》, 《맹자》를 꽤나 읽는다고 읽었지만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열댓번 쯤 읽었으려나? 일단 백 단위로 헤아릴만큼 같은 글을 반복해 읽는다는 건 보통의 인내심이 아니고선 어려운 일이다.      


승정원일기를 좀 더 찾아보니, 경서를 잘 외웠던 이창섭씨는 안타깝게도 고위관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종6품으로 서울살이를 마친 뒤 관직생활 20여년 만에 영남의 칠원 현감(柒原縣監)으로 나갔다. 이후 75세 무렵까지 녹봉을 받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장수하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신 듯 하다.   

   

누군가는 《맹자》를 300번 읽고 문장의 이치를 알았다고 하고, 어느 선생님께서는 《초결가(草訣歌)》를 200번만 쓰면 초서(草書)에 통달할 수 있으니 어려울게 하나도 없다는 말도 하신다.  "200번만 쓰면 된단 말이지. 한 번 해볼까!" 하며 초서 달인이 되고자 의욕에 불탔었지만 반 년이 지나도록 두 번 밖에 써보지 못했다. 늘 새로운게 즐거운 나로서는 같은 걸 반복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정답은 반복에 있는 것을. 올해가 가기 전에 《초결가》를 단 열 번이라도 채워 써보기로 여기에 공언(公言) 해본다.

제발 공언(空言)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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