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의 문제적 언어패턴#1 - 욕망을 우회하다
상황 1 : 욕망을 우회해서 표현하는 사람의 대화
<상황1>
진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진수는 사장님과 사이가 좋으며 일도 그리 게을리하지 않는 편이다.
오늘도 진수는 카페에서 일한다.
평소에 빵을 진열하거나 커피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진수에게 새로 나온 빵들을 포장하는 일을 시키려고 한다.
사장님 : 진수야, 이거 포장하고 싶지 않아?
진수 :... 아, 사장님 이거 포장하시려고요?
진수는 사장님의 질문에 잠시 당황하였지만, 포장을 돕는다.
진수는 당시 빵을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장님이 시키면 거절할 타입의 알바생은 아니다.
그래서 진수는 사장님이 차라리 “진수야, 이것 좀 포장해.”라고 간단하게 말했으면 훨씬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장이 안 된 빵을 보고 포장하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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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솔직히 이러한 대화가 단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별로 커다란 심리적 갈등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패턴을 계속해서 구사하는 사람과 정기적으로 같이 있게 되면 심한 불편감에 빠질 수 있다.
사장님의 언어 패턴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가 없을 때 나오는 패턴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당연히 물어보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그저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그리고 타이밍이 지나가면 본인이 이름 모를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 다른 구실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보복한다. 그것이 아주 작은 형태의 보복일지라도. 그리고 보복당한 타인은 도대체 뭐 때문에 자신한테 보복하는지 어리둥절해한다. 또는 그 보복이 너무나 은밀하고 사소한 것이어서 상대방은 자신이 보복당했는지조차 모르지만, 경미한 불쾌감이나 난처함을 느낀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기반으로 설득할 수 없는 소심하고 무력한 사람이라면, 아들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아예 모른다. 또한, 어머니가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을 계속해서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즉 커서도 아기 대접을 받아온 아들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항상 누군가에게 챙김과 보살핌을 받을 줄만 안다. 자신이 취해야 할 것을 타인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그 요구에 타인이 응답하는, 일련의 과정과 절차에 대한 경험이 없다. 어머니의 보살핌이 부재한 상황적 맥락에 놓이게 되면 항상 낯설어한다. 이것은 그가 사십, 오십이 다 된 아저씨가 되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자의 경우 어머니와의 이슈가 있는 사람이다. 여성성보다 남성성을 주로 쓰는 어머니를 두면 딸은 ‘여성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여성의 언어’는 감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타인과 감정의 공명을 같이 느끼고 공명된 감정을 주된 대화 맥락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여성의 언어를 쓰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를 어머니로 둔 딸은 어머니와 똑같이 여성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일상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여성은 여성의 언어를 써서 타인을 설득한다. 그러나 일상의 상황에서 여성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쭙잖게 남성의 언어를 쓰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색함이 흘러나온다. 이 사장의 어색한 언어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개인의 언어 패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지문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똑같은 패턴의 맥락을 타인과 형성하려고 하며, 그 언어 패턴에 문제가 있다면, 자연스레 그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 사람과는 맥락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맥락을 선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