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삼국사기』

기록으로 세운 나라의 얼굴

by 영백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문장에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신화도 없고, 기적도 없으며, 극적인 장면 역시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대신 연도와 사건, 인물의 행적이 차분하게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이 선택한 것은 이야기보다 태도라는 사실을.


김부식은 역사를 쓰며 분명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는 나라의 기록은 감정이 아니라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승자의 감정도, 패자의 한도 거의 남지 않습니다.

오직 남는 것은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그르쳤는가”라는 판단입니다.

이 절제된 문체 속에는, 나라를 지탱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단순한 과거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후대의 통치자와 백성을 향한 경고문에 가깝습니다.

어떤 왕이 왜 나라를 잃었는지, 어떤 선택이 백성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그리고 어떤 순간에 나라가 다시 일어섰는지. 김부식은 그 원인을 감정 없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은 차갑지만, 동시에 무겁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공정한 기록’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는 모든 인물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개인의 감정보다 역사가 남겨야 할 기준을 우선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정통 사학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을 남기는 일.


『삼국유사』가 잊힌 이야기를 품어주었다면, 『삼국사기』는 흔들리는 기억에 중심을 세웠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기록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나라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화와 사실, 감정과 판단— 역사는 늘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삼국사기』는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

SNS와 뉴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실보다 감정을 먼저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김부식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말합니다.


기록은 곧 책임이다.


책장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는 사건의 총합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결과라는 것.

『삼국사기』는 그 시선을 가장 엄격하게 단련한 책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은 따뜻하지 않지만,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야말로 공동체를 오래 버티게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삼국사기』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서, 우리는 나라가 스스로를 설명하려 했던 가장 진지한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기록으로 세운 나라의 얼굴— 그것이 바로 『삼국사기』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참고문헌


김부식, 『삼국사기』, 이병도 옮김, 을유문화사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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