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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Feb 06. 2022

팩트 폭행

공감과 사랑에 의한 인식의 승인은 결코 이성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 니콜라이 베르댜예프


    사실이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고 당위란 세상이 마땅히 작동해야 하는 방식이다.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은 그의 저서 《괴짜경제학》에서 ‘도덕은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방식을 가리키고, 경제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즉, 경제학은 사실에 관한 학문이고, 윤리학은 당위에 관한 학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은 당위에 관한 격언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격언이다. 이 문장이 당위에 관한 문장이 되려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당위란 인간적인 개념이다. 벼에겐 당위가 없다. 벼는 벼가 작동해야 하는 바람직한 방식에 관심이 없다. 고개를 더 숙이고 싶어 하거나 덜 숙이고 싶어 할 수도 없다. 인간적 당위에 따라서 쌀을 많이 맺게 하자는 의미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어쨌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존재 방식을 서술한 문장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뿐, 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응한 비유로 해석하면, 많이 배웠다는 건 겸손도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당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흔히 내향인은 인간관계가 적은 사람이고, 외향인은 인간관계가 많은 사람이라 여기는 듯하다(존재). 그러나 내향인이란 인간관계가 적은 사람이 아니라 적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외향인은 인간관계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많기를 바라는 사람이다(당위). 인간은 관계없이 살아가기 어렵다. 아무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은 내향인이든 외향인이든 불행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든 인간은 많은 관계를 맺길 바란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누군가는 적은 관계를 맺길 바란다. 없는 걸 바라는 건 아닐지라도. 인간관계가 적은 것이 곧 불행인 것은 아니다. 불행인 것은 인간관계가 많은 내향인과 인간관계가 적은 외향인이다. 존재와 당위의 불일치가 불행을 초래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 존 롤스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오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해내는 오류를 자연주의의 오류라 한다. 존재하는 방식이 옳은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당위로부터 사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도덕주의의 오류라 한다.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이 사실을 규정하진 않는다. 당위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곧 당위라 주장하는 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자연주의의 오류는 자유주의자, 차별주의자, 정치적 보수에서 주로 발생한다. 자유주의자는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에 의한, 개인에 대한 통제는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사회는 특정 가치(당위)에 대해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주장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식의 자유주의는 내재적 모순이 있는 듯하다. 왕정국가에서 자유주의란 현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이기에 진보일 것이다. 자유는 중립이 아니라 지향이다. 게다가 가치에 대해 중립이란 결코 중립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는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 유지를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는 주로 정치적 보수로도 읽힌다.


    이들에게 당위란 현상 유지이므로, 존재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그것이 곧 옳은 삶의 방식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것이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반면,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고 태어난다. 이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 대우해야 한다(당위)고 주장하는 건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르게 대해야 한다.’, ‘동성 간의 결혼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기에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과거의 군대는 열악했기 때문에, 지금의 군대도 그래야 한다.’ 등 일상에서 자주 들어봤던 주장들이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집단을 다르게 대한다고 전부 차별인 것은 아니다. 정당화할 수 없을 만큼 다르게 대하는 것이 차별이다. 평등은 다른 것은 다르게, 같은 것은 같게 대하는 것이다. 같은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차별이고, 다른 것을 같게 대하는 것이 역차별이다. 어떤 사람은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수 계산이 빠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운동선수를 임의로 뽑는다면 그것은 역차별(다른 것을 같게)이다. 수 계산을 잘하는 사람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을 운동선수로 뽑는 게 바람직하다.


    반면 도덕주의의 오류는 사회주의자, 정치적 진보에서 주로 발생한다. 사회주의자는 사회가 스스로 작동하는 방식이 곧 옳은 방식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옳은 사회의 작동 방식에 따라 사회를 통제하려 시도한다. 따라서 당위를 강조한다.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사회 제도를 개선하려 하기에 주로 정치적 진보로 불린다.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당위에 심취한 나머지 사실을 당위에 맞추어 왜곡하기도 하는데 이를 도덕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전부 똑같이 태어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강력범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강력범죄가 없다고 여기는 것도 도덕주의 오류에 해당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 걸쳐 어린이들은 시험을 보거나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단순한 사실뿐만 아니라 뉴턴 패러다임의 기본인 인과율과 수량화에 따라 생각하는 방법도 배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교육자들이 어린이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교육과정에서 자기들이 특정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교육자는 별로 없다. 그들은 그저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객관적으로' 사고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주요 관심사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긴 얘기가 필요 없다.
    사고 과정은 그 과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 때만 의미가 있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사실을 배운다는 뜻이다. 우리 교육제도는 사실에 최우선 순위를 둔다. 어떤 학생이 더 많은 지식의 파편을 끌어모아 그것을 생각해낼 수 있으면 더 나은 점수를 받는다. 사람들은 사실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실을 알아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삶을 더 잘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관한 '사실의 양은 몇 년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 결과 세상이 두 배 더 질서정연해 졌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사실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을 보여달라. 그러면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이 이야기가 어딘가 데카르트, 뉴턴, 베이컨을 닮아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이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모아봐야 우리 주변에 혼란과 무질서만 늘어난다는 증거가 있는데도 우리는 사실을 찾아 전 세계를 뒤지고 다닌다. 이것은 아직도 인간이 위의 세 사람이 주창한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세종연구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파악하고선 진실을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팩트 폭행’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상대는 팩트에 대해 무지하고, 내가 팩트를 전달하여 상대를 굴복시켰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팩트 폭행도 폭행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게 ‘당신은 장애인입니다’라고 말하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떠한 맥락 하에서도 허용되는 것인가? 만약 어떤 대형마트에서 장애인을 차별할 의도를 가지고 장애인이 마트에 입장할 때마다 장내 방송으로 ‘장애인이 입장하였습니다’라고 방송한다면, 이는 사실의 전달이기에 허용되어야 하는가?


    사실이 사실이라는 이유로 그 발화가 언제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정당화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정당성은 ‘발화의 당위’에 관한 문제이다. 진실은 사실을 포함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이 전달되는 맥락을 포함한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의도, 화자의 당위가 함께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만을 강조하는 시각이 만연하다. 과학은 사실을 탐구하고 윤리학은 당위를 탐구한다. 과학 교육의 중요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리지만, 윤리 교육의 중요성은 과학 교육만큼 강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근데, 팩트잖아. (희번덕)" - 범인(凡人)


    무슨 말만 하면 ‘팩트’를 운운하는 것도 그 영향일 것이다. 사실 중심의 가치관이 보편적으로 스며들어 있기에, 요즘 사람들에게 자연주의의 오류는 직관적으로 오류라고 잘 느껴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실과 당위 중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과 당위를 구분하지 못했을 때 범하는 오류인 자연주의의 오류가 도덕주의의 오류에 비해 더욱 쉽게, 자주 발생한다.


    인간은 답이 없는 문제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 불확실성은 스트레스를 준다. 코로나 상황에서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큰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당장 다음 달에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지, 가족 모임을 할 수 있을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지 코로나 전에는 비교적 불확실성이 적었던 일상의 사건들 조차 코로나 이후에는 예측이 어려워졌다.


    사실 중심의 가치관은 진리가 아니라 프레임이다. 과학이 답을 제시한다고 믿는 건 진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과학이 답을 제시한다고 믿어서 사람들이 윤리보다는 과학에 더 관심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윤리에는 보편적으로 옳다고 믿어지는 답이 없으며, 구체적인 조건과 상황 하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이란 무궁무진하고, 그 다채로운 상황에 대한 답을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구체적 상황에서 그때그때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운동 실력과 같아서 몸을 움직여 근육을 기르듯이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생각하여 뇌의 근육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과학에서의 답이란 잠정적이다. 관찰에 따라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부합하는 관찰이 누적될수록 가설은 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가설에 반하는 사례가 관찰되면 답이라 여겼던 명제가 더는 답이 아니게 된다. 답은 답이라 믿어질 뿐이다. 믿음은 언제나 붕괴될 수 있다. 과학 문제는 답이 있어 보이고 윤리 문제는 답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학이 답을 제시한다고 믿는데,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다가가려는 인간적 시도에 불과하다.


    진실은 사실과 당위를 모두 포함한다. 둘 모두를 파악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진실이라며 제시되는 명제들은 단순히 사실만을 제시했거나,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는 없는 어떤 당위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사실뿐만 아니라 진실을 파악하려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실과 당위를 구분해야 한다. 사실과 당위를 구분 못하는 팩트 폭행은 무지의 소산이며 원시적 폭력이다. 사실의 옳고 그름 뿐만 아니라 당위의 옳고 그름까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과학 철학으로 훈련할 수 있고, 당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윤리학으로 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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