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현동 이슬람 사원과 혐오, 그리고 우리의 기본권
빨갱이라는 단어는 한때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2년 가을에도 그랬다. 밥상머리에서 우리 외할아버지는 박근혜 후보를 뽑지 말라는 나의 말을 “빨갱이 소리”로 일축했다. 공학자이자 테크노크라트의 삶을 산 그를 나름 합리적인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당신의 말에 실린 감정은 분명한 혐오였고, 그의 배제적인 언어는 나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반공주의를 앞세운 권위주의 정권이 사라진 지 20년도 넘었던 2012년에 ‘빨갱이’라는 말이 여전히 나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이유는 혐오의 단어가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빨갱이를 언급한 순간 나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그들의 볼멘소리가 되었다.
누가 빨갱이인지는 빨갛지 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결정한다. 혐오의 언어는 공동체 내부와 외부 사이에 임의의 선을 긋고, 선 바깥의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빨갱이라는 단어 앞에서 시민의 기본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사문화됐다. 혐오자들에게 함께하지 못할 이질적인 존재는 바이러스와 같은 박멸의 대상이고, 격리와 배제만이 유일한 치료제다. 낙인찍힌 이들의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항변이 아무 소용이 없었던 이유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권이 물러가며 빨갱이라는 단어는 이제 공론장에서 힘을 잃은 지 오래지만, 다양한 종류의 혐오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서 배제와 차별이 작동하는 대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국제적 경제 서열을 내면화한 일부 시민들은 소위 ‘후진국’에서 온 이주민들을 제대로 된 보편 인권조차 누릴 수 없는 2등 주민의 위치로 격하시키고, 이를 자국민 중심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백인 남성은 융숭한 대접을 받지만, 수도권 외곽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 허가가 나야만 이직할 수 있는 현대판 노예 계약을 맺는다.
올해 2월 대구 북구에서 주민들의 반대로 건설이 중단된 이슬람 사원은 촘촘히 작동하는 약자 혐오를 분명히 보여 준다. 해당 필지에는 종교 집회장 건설이 가능하지만, 주민들은 이슬람교도들이 기도하는 장소를 쓰레기 처리장과 같은 혐오 시설로 바라본다. 주위에 십수 개의 교회와 절이 있어도 이슬람 사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취재 기자에게 “이슬람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충고하며 “후손들에게 재앙이 된다”고 말한다. 외국인이 건설하는 사원이라 허가를 내주면 안 된다고도 맞선다.
하지만 독실한 교회 신자와 성소수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믿는 성서 근본주의자들이 같지 않듯, 알라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평범한 무슬림들은 다르다. 유럽형사경찰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 발생한 테러의 대부분은 백인 우월주의자 등 극우 세력이 저지른다. 게다가 이슬람 사원의 건축주인 나르드 칸씨는 귀화한 한국인이다.
이슬람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무슬림을 지역 공동체에 들일 수 없는 존재로 타자화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종교를 믿는 이상한 외국인이라 낙인찍힌 그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주민들은 공동체를 지킬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편견에 기반한 혐오이고 차별이다. 라마단 축제 때 나는 향신료 냄새와 도서관 소리보다도 낮은 데시벨의 기도 소리를 종교의 자유를 제한할 이유로 내세우기엔 궁색할 뿐이다.
진정한 위협은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 편견에 찌든 혐오와 차별, 그리고 배제의 언어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종교의 자유” 때문에 이슬람이 무차별적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말한다. 혐오의 언어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혐오는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법치주의도 흔든다. 국가 행정은 요건을 갖춘 이들에게 차별 없이 제공돼야 하지만, 구청은 주민의 강력한 반발을 마주하자 행정 소송에서 질 게 예상되면서도 공사를 중단시켰다.
커지는 혐오는 우리 사회가 오랜 기간 공들여 세운 원칙을 위협한다. 빨갱이라는 낙인찍기가 오랜 기간 다양한 목소리를 공론장에서 배제했듯, 근거 없는 이슬람 혐오는 우리 사회를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폐쇄적인 곳으로 추락시킨다. 당장은 우리 삶에 별 지장이 없어 보여도 배제와 차별은 내가 남들과 다를 수 있는 소중한 토대를 위협한다. 종교가 없고, 이주민도 아닌 시민들도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설 중단 사태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