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영, <종의 기원담>
신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나 신이 수많은 모델 중 어떤 모델을 닮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도 화가들은 언제나 가장 안정적인 모델로 알려진 700 모델을 토대로 성화를 제작한다. 그래서 신은 늘 전신을 금으로 도금하고, 네 개의 바퀴를 달고, 오른쪽 귀 위쪽과 양 팔목에 700의 일련번호를 새긴 모습으로 그려진다.
- 김보영, <종의 기원담>
작품의 배경은 먼 미래(혹은 과거일지도?), 로봇들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검은 구름 때문에 태양빛이 가려져서 어둡고 추운, 한 마디로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다. 대신 산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녹슬지 않는 로봇들은 진화를 거듭한다.
로봇들의 진화란 무엇일까? 이 세계는 '효율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차별받는 로봇들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고, 두 발로 걸으며, 상처 나기 쉬운 연약한 피부, 쓸데없는 부품들(가슴, 성기, 머리카락 따위)을 가지고 있는 네 자릿수 모델들이다. 대신 이곳에서 추앙받는 모델은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신체, 어디든지 빠르게 갈 수 있는 두 바퀴를 가지고 한 번에 엄청난 양의 지식을 처리할 수 있는 700 모델들이다. 주인공 케이 역시 네 자릿수 모델이고, 그가 가진 두 다리, 부드러운 피부(얼굴만)는 '약함과 쓸모없을'을 의미한다.
생물학자인 케이는 세실이라는 네 자릿수 로봇을 만난다. 세실은 유기생물학이라는 인기 없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생이다. 세실과 칼스트롭 박사는 케이의 논문을 바탕으로 '유기생물'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지만, 반대로 뒤집어보면 상황은 점점 명확해진다. 로봇이 자신과 다른 존재인 '생물'을 탄생시키고 싶어 하듯이, 인간 역시 ‘나와 닮은 존재’를 탄생시키고 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케이는 '공기'라는 환경적인 조건이 있어야 유기생물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공기는 반대로 로봇을 녹슬게 (로봇의 생명을 위협하는)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로봇들은 자신의 몸을 포기해 가면서 생명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힌다.
재미있었던 것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 케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케이를 응원하면서 그래, 생명이 태어나기 시작하면 너네 로봇들은 살 수 없어! 그러니까 막아야 해!라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로봇들 중에서도 '인간적인 흔적'이 남아있는 모델이라서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인류가 이뤄온 수많은 문명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스 신전, 피라미드, 영국과 프랑스의 궁전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할 거라고 믿는 '성장'의 이미지들도 생각났다. 정복하고, 파괴하고, 다시 세우고, 더 높게 건축할 수 있음을 자랑하고...
하지만 결국 '영원'을 사는 로봇 역시 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듯이, 인간 또한 이 세계를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졌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누구도 자기 의지로 태어남을 정할 수 없듯이, 누구도 이 세계의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할 수는 없다. 각 생명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푸르던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듯이.
우리는 ‘인간 답게' 살기 위해 다른 수많은 존재들을 내쫓고, 배재하고 죽이며 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산을 깎아 지어졌으며,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은 알지 못하는 동물들의 죽음으로 만들어졌다. 동시에 그들 없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 역시 다른 생물들(로봇을 포함한)과 같이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뒤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이지만, 최대한 스포 없이 쓰고 싶어서 다음으로 미뤄둔다. 책 속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눈을 들어 햇빛을 마주하면 문득 이 순간이 낯설게 느껴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될 것이다.